“내 삶 자체가 차별의 증거” 1세대 장애운동가의 투쟁사

김남중 2023. 3. 3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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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이규식 지음
후마니타스, 304쪽, 1만7000원
전동 휠체어 스쿠터를 타고 차도 시위에 나선 이규식을 경찰들이 둘러싸서 막고 있다. 이규식은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자 지난 20여년간 한국 장애인 운동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최인기 제공


책을 읽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래 깊게 들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듣기, 또 듣기로서의 읽기는 남을 이해하게 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독단과 편협함으로 무장한 이 시대의 날선 갈등은 어쩌면 듣지 않기, 읽지 않기가 만들어낸 풍경인지도 모른다.

여기 이규식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도착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누리는 이동, 학습, 노동, 주거 등의 권리를 죽을 때라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규식은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다. “어머니가 연탄가스를 마셔서 그렇게 태어난 건지, 동네 우물에 문제가 있어선지, 한의원에서 침을 잘못 맞은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를 갖게 됐다.

그는 10대 후반까지는 집에, 그 이후에는 장애인 시설에 갇혀 거의 30년을 살았다. 학교에 다닐 엄두도 못냈고, 스무 살에 전동 휠체어 스쿠터가 생기면서 혼자 외출을 할 수 있었다. 혼자서 처음 여행을 한 게 20대 후반,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한 게 서른 즈음이었다.

이규식은 한국 장애인운동의 최일선에 서있는 1세대 장애운동가이기도 하다. 1996년 서울 혜화역에서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를 당한 후 ‘장판(장애인 운동판)’에 뛰어들었다.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동권연대)’ 투쟁국장, 한국 최초의 장애인 탈시설 운동 단체인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발바닥)’ 창립 멤버, 탈시설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지원하는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음센터)’ 초대 소장을 거쳐 현재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50대 중반에 이른 이규식의 생애를 기록한 이 책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를 끊임없이 물어야 했던 한 중증 장애인의 개인사이면서 지난 20여년간 치열하게 전개된 한국 장애인 운동사가 된다.

이규식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 내보이며 “내 삶 자체가 차별의 증거다”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 장애인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 그들에게 이동권과 탈시설, 활동보조 등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그의 삶이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규식은 전동 스쿠터, 장콜(장애인콜택시), 저상버스 등을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었고, 탈시설을 통해 자유와 친구를 얻었다. 또 장애인 활동보조를 받아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동을 해야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노동의 기회가 생기는데 이동부터 어렵다”면서 “이동권 하나만큼은 꼭 이뤄내고 싶다”고 강조한다.

장애인 운동의 성과를 통해 우리 사회가 전진해온 과정도 확인할 수 있다. 장애인들은 지하철역 바닥에서 기고, 버스 밑에 들어가고, 도로를 막고, 구청이나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했다. 그 결과로 장애인 시설의 반인권적 행태가 폭로됐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편하게 탈 수 있는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우리 사회가 쓸모없다고 치부한 사람들이 모여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힘겹게 싸워 쟁취한 것이다.”

이규식은 마지막 장 ‘전사의 꿈’에서 자신의 장례식 장면을 상상하며 생을 마감할 즈음엔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한다. “저상버스가 지역마다 골목골목까지 누비고 장콜뿐만 아니라 일반 택시도 장애인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세상. 활동보조 시간도 필요한 만큼 주어지고 다양한 공공 일자리가 생겨나 일하는 장애인을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세상.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일하고 밥과 술도 같이 먹으며 어울려 지내는 세상….”

한국에서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 본인의 언어로 책을 써낸 것은 처음이다. 이규식은 손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집필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비장애인 동료 세 명이 ‘집필 활동지원사’로 나서 그의 말을 받아쓰는 방식으로 책을 완성했다. 말을 뱉기 위해서는 힘을 짜내야 하는 언어장애를 가진 그에게는 말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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