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숙∙삼겹살집이 카페 됐다…확 달라진 그 시절 낡은 '엠티 촌'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난 사람이라면 북한산 아랫마을 우이동에 관한 추억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다. 북한산(837m)을 찾는 등산객의 오랜 아지트이자, 1980~90년대 대학생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엠티 촌이 우이동이었다. 어쩌면 우이동은 서울에서 가장 서울답지 않은 동네였다. 북한산 서쪽 자락에 틀어 앉은 이 동네에선 고층빌딩보다 산등성이가, 화이트칼라보다 등산복 차림의 탐방객이 더 흔히 보여서였다. 동네 면적의 80%가 북한산 국립공원의 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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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집 옆 베이커리
우이동 유원지는 북한산 서쪽 자락 가을철 단풍 코스로 이름난 우이령길(소귀 고개) 초입에 형성된 뿌리 깊은 먹자촌이자 엠티 촌이다. 지금도 북한산과 우이천이 만나는 깊은 계곡을 따라 30~50년씩 된 식당이 30개 이상 줄지어 있다. 대부분이 너른 마당과 계곡을 끼고 있는 가든‧민박형 식당으로, 1980~90년대 대학생이 단체로 몰려드는 아지트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우이동 유원지는 대학생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중장년층과 가족 단위 고객을 상대하는 계곡형 먹자촌 이미지가 굳어졌다.
백숙과 삼겹살이 흔했던 우이동 유원지의 상차림이 요즘 몰라보게 달라졌다. 유행과는 담을 쌓았던 이곳에 근래 젊은 감각의 상점이 속속 들어서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화의 계기는 코로나바이러스다. 단체 손님을 상대하다 사적 모임 규제, 집합 금지 등 조치로 막대한 손해를 본 우이동 상인들이 하나둘 카페 창업에 나선 것이다.
4대를 이어온 한정식집 ‘옥류헌(현 카페 ‘릴렉스’)’도, 40년 내력의 능이백숙집 ‘청산가든(현 카페 ‘산아래’)’도 그렇게 카페가 됐다. 연수원을 고쳐 대형 베이커리 카페로 거듭난 ‘하이그라운드 제빵소’도 있다. 도심에선 보기 힘든 ‘신상 계곡 뷰’ 카페와 빵집은 MZ세대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이 났다. 지난가을에는 주말 하루 가게마다 10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단다. 낡은 유원지가 코로나로 답답한 일상을 보내던 젊은 층의 새로운 아지트로 거듭난 셈이다. 군사정권 시절 정·재계 인사가 은밀히 드나들었던 북한산 도선사 인근의 요정 ‘선운각’도 지난해 한옥 카페로 거듭나며 손님 몰이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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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쿠지에 누워 본 북한산
14개 동 334개 객실, 야외 수영장 따위를 갖춘 럭셔리 리조트의 등장으로 북한산과 우이동을 즐기는 문화도 사뭇 달라졌다. 김선희 문화해설사는 “등산복 차림의 탐방객 못지않게 쫙 빼입은 나들이객의 비중이 높아졌다”고 요약했다. 북한산이 더는 정상 등정만 노리고 찾아오는 산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제는 북한산을 내다보며 노천욕을 할 수 있고, 동동주와 파전이 아니라 파인다이닝과 달콤한 디저트로 산행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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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도 반한 북한산
등산‧아웃도어 문화의 유행이 최근 MZ세대까지 확대된 영향이 무엇보다 크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북한산’이 MZ세대의 전유물이 된 지 오래다. 서울 도심을 내다보는 인생 사진 명소이자, 레깅스룩·고프코어룩 등 다양한 멋을 뽐내는 아웃도어 패션의 성지로 거듭났다. 국내 입국 규제가 대폭 완화된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외국인 등산객도 부쩍 늘었다. 김선희 문화해설사는 “TV 예능을 통해 북한산 풍경이 해외에도 입소문이 퍼져 외국인 등산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요즘은 북한산우이역(경전철 우이신설선) 앞에 있는 서울 도심 등산관광센터가 ‘산린이(등산+어린이’)와 외국인 등산객을 맞는 허브로 통한다. 등산용품 대여 서비스(외국인 등산객과 외국인 동반 내국인 대상)를 비롯해 샤워실과 탈의실, 짐 보관 등 다양한 편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 9월 개관해 어느덧 5000명 가까운 인원이 들었다. 방문객 대부분이 20~30대 젊은 층이다.
센터에서 맞춤 산행 코스를 짜 줘 초보 등산객에겐 여러모로 얻어갈 게 많다. 꽃피는 봄에는 진달래능선,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울창한 우이령길을 추천하는 식이다. 서울 도심 등산관광센터 김민찬 매니저는 “MZ세대에게는 최고봉인 백운대보다는 30~40분 만에 오를 수 있는 영봉(604m)이 더 인기가 많다”고 귀띔했다. 비교적 힘은 덜 들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도 건지기 좋아서란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백운탐방지원센터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탐방객이 많이 보였다. 그들과 함께 산길을 올랐다. 북한산 인수봉을 마주 보는 영봉 정상, 서울 도심을 내다보는 너럭바위 위에서 그들처럼 인증사진 수십장을 찍고 내려왔다. 흘린 땀은 적었으나, 성취감이 대단했다. 미국에서 온 대럴은 “북한산만 다섯 번째”라며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쉽게 산을 탈 수 있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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