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클로 제쳤다…탑텐, K패션 자존심 지켜 [CEO 라운지]

박수호 매경이코노미 기자(suhoz@mk.co.kr) 2023. 3. 29.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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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순 신성통상 회장

“언제부턴가 자라, 유니클로 같은 SPA(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우리나라 시장을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들 브랜드 제조사는 신성통상 같은 국내 업체입니다. 그런 제품이 다른 브랜드 이름을 달고 다시 우리 안방 시장에서 활개 치는데 정작 우리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2017년 염태순 신성통상 회장(70)이 매경이코노미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만든 브랜드가 ‘탑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국내 시장에서 토종 브랜드로 SPA 부문 1위 자리를 꿰찼다.

지난해 신성통상 탑텐은 약 78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유니클로 운영사 에프알엘코리아 매출액 7043억원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유니클로는 2019년 국내 매출액이 1조3780억원에 달했던 브랜드다. 이후 한일 관계 경색으로 국내 소비자 사이에서 ‘노노 재팬’ 운동이 일었고 코로나19 영향을 받으면서 역성장했다.

탑텐은 이 틈새를 공략해 사세를 확장한 끝에 2021년 유니클로를 근소한 차이로 제치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는 탑텐 성장세도 있었지만 유니클로의 매출 타격 여파가 더 컸다. 숫자만 보면 탑텐 매출이 5850억원, 유니클로 매출은 5824억원이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실적이 그래서 더 의미 있다고 분석한다. 방역 단계가 떨어지면서 외출이 잦아진 상황에서 탑텐과 유니클로가 맞붙었다는 점 그리고 나란히 매출이 늘어났다는 점 등 조건이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때 탑텐이 우위에 섰다는 건 그만큼 그동안의 노력과 내공이 꽃피운 결과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해낸 이가 염태순 회장이다.

1953년생/ 1980년 효동기업 입사/ 1983년 가나안상사 설립/ 2002년 신성통상 대표이사 회장(현)
염 회장 이력은 독특하다. 1953년생인 그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연극에 빠졌다. 그러다 대기업 신입사원 입사 나이를 넘겨 취업을 하기 힘들었다. 당시 중소 무역 회사는 그래도 취업 자리가 좀 있었다고. 1980년 효동기업에 입사한 배경이다. 가방 무역이 주력이었는데 여기서 염 회장은 수출입 시장 메커니즘에 대해 눈을 떴다.

다만 아쉬운 건 월급이었다. 어느 정도 수출 경험을 쌓은 후 그는 독자적으로 사업해야 자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방 무역 회사 ‘가나안상사’를 창업했다. 사업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만 제조해서 수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불어 미국 수출도 한국 제품 쿼터제(수출 물량 제한)가 시행되면서 타격을 받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는 번 돈을 계속 해외 공장을 짓는 데 썼다. 그렇게 섬유패션 부문에서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1호 진출 기업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오히려 기회

해외 진출을 일찌감치 하고 나니 기회가 왔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도래하면서 대기업이 잇따라 쓰러졌다. 반면 가나안상사는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재무 상황이 오히려 괜찮았다. 외환위기 당시 원달러 환율은 1달러에 2000원 가까이 육박할 정도였다. 달러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가나안상사로서는 나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자본력을 바탕으로 당시 매물로 나온 대우그룹 계열 제조 회사 신성통상에 베팅했다. 신성통상은 일찌감치 해외 의류 공장을 보유하고 있던 탄탄한 회사. 매출액도 3000억원대로 당시 가나안상사 대비 3배가 넘었다.

염 회장은 고민 끝에 신성통상을 1200억원이라는, 당시 섬유패션업계에서는 엄청난 금액을 치르고 인수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먹었으니 성장통이 올 수 있겠다는, 일명 ‘승자의 저주’를 운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신의 한 수’였다. 탑텐 포함 오늘날 신성통상은 매출액 1조4657억원, 영업이익 1399억원짜리(2022년 기준) 패션 대기업으로 우뚝 올라섰다.

더불어 염 회장은 탑텐 성공 이전에도 토종 브랜드 육성 노하우가 이미 있었다. IMF 외환위기 전후 국내 가방 시장에 한 차례 해외 브랜드 붐이 일었다. 이스트팩, 잔스포츠가 젊은 세대를 강타하면서 이 브랜드 가방을 들지 않으면 유행에 뒤처진 사람처럼 여기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염 회장은 가나안상사의 해외 생산 능력, 국내 다양한 디자인 역량을 모아 ‘아이찜’이라는 국산 가방 브랜드를 만들었다. 색상, 디자인도 빠른 시간 내 다양한 버전으로 갖췄다. 가격도 외산 브랜드 대비 20% 정도 낮게 책정했다. 외환위기 이후 ‘바이 코리아’ 열풍이 불면서 국산품 소비 인식이 높아졌고 디자인 역시 합리적인 터라 아이찜 인기는 점차 높아졌다. 출시 2년 후에는 외산 브랜드 매출을 뛰어넘었다. 이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탑텐’도 만들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코로나19 때 역발상 투자 늘려

염 회장의 ‘역발상 전략’ 사례는 이뿐 아니다. 코로나19 장기화 때 그는 오히려 공격적인 확장 전략을 펼쳐 업계 화제를 모았다. 통상 감염병 시대 가장 타격을 받을 사업은 패션, 뷰티 산업으로 치부됐다. 물론 신성통상도 힘들기는 했다. 하지만 염 회장은 이때 오히려 과감히 투자를 늘렸다. 회사 관계자는 “글로벌 납품처 주문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코로나 시기에 상품 공급망 이슈가 계속 발목을 잡을 것이라 판단, 세계 곳곳에 있는 자체 생산 인프라를 활용해서 탑텐 등 자사 브랜드에 더 품질 좋은 상품을 공급했다”며 “가격 책정 역시 경쟁사 대비 합리적으로 하면서 판매했더니 매출액이 오히려 늘어났다”고 말했다.

유통 채널 다각화도 힘을 발휘했다. 특히 코로나19가 심화할 때 오프라인 매장을 더 많이 열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 이때 좋은 입지의 상업용 부동산 공간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많이 나왔다. 탑텐은 각 지역 핵심 요충지마다 자리를 차지하면서 탑텐을 더 알리는 기제로 활용했다.

아쉬운 건 온라인 비중

이렇게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동안 아쉬운 점도 있다. 코로나 장기화 당시 다른 패션 업체는 온라인 판매를 강화했다. 하지만 신성통상은 역발상 경영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온라인 시장 비중이 적다. 회사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로 자동화 설비를 갖춘 온라인 전용 물류센터를 본격 가동해 온라인 사업을 좀 더 강화하려고 한다”며 “사내에서는 ‘온라인 비즈니스 2.0(차세대 플랫폼 투자)’을 외치며 플랫폼 재구축을 하고 있는데 올해 하반기에 그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약점도 꽤 있다.

지난해까지는 ‘킹달러’ 여파로 외형 성장이 도드라졌는데 최근 원달러 환율이 안정화되면서 환차익 효과도 반감되고 있다. 주력 수출처인 북미 시장 주요 브랜드 재고가 쌓이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판매가 저조하면 그만큼 주문량을 줄일 수밖에 없어서다.

탑텐만 따로 떼놓고 보면 최근 한일 관계 호전으로 유니클로 매출이 다시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어 언제든 역전될 수 있다는 점도 지켜볼 일이다.

토종 패션 브랜드 육성 프로젝트에서 일단 승기를 잡은 염 회장이 경기 침체 국면에서 오히려 또 어떤 ‘신의 한 수’를 선보이며 도약할 것인지 유통업계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2호 (2023.03.29~2023.04.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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