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2030

윤석만 입력 2023. 3. 29. 23:00 수정 2023. 3. 30.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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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세계보건기구(WHO)가 ‘번아웃(burnout) 증후군’을 국제질병분류(ICD) 체계에 기재하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질병’까지는 아니지만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으로 봤기 때문이다. 증상으로는 만성 피로감, 업무에 대한 정신적 거리감, 업무능력 저하 등을 꼽았다.

김종길 덕성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번아웃을 “산업사회라는 톱니바퀴 안에서 자기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그 책임까지 모두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에너지가 고갈돼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번아웃은 보통 한 분야에서 오래 종사한 이들이 겪을 가능성이 크다.

「 20~30대 절반가량 번아웃 심각
구직 포기 청년 49만, 역대 최다
“미래 불안한 하이텐션 사회 병폐”

그러나 요즘엔 20~30대 신입사원들이 입사하자마자 번아웃에 빠지기도 한다. 이제 막 원하는 회사에 들어왔는데 곧바로 번아웃이라니,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의아함이 앞섰다.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만큼, 열정과 패기가 오히려 넘쳐야 하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김병규 넷마블 경영기획담당(COO)은 이렇게 설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입시에 시달리고 성인이 돼서도 치열한 취업 경쟁에 내몰리다 보니 정작 입사라는 ‘꿈을 이룬’ 다음엔 번아웃이 오는 것 같다.” 20년 가까이 공부하느라, 취업 준비하느라 지쳤으니 “이젠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인 대학 교직원이나 공무원 조직도 상황은 비슷하다. 서울의 한 사립대 인사처장은 “신입 직원이 막상 출근하고 나면 면접 때 그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라고 했다. 세종시에 근무 중인 중앙부처의 한 40대 서기관도 “무기력한 20대를 보면서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월 헬스케어 스타트업 ‘포티파이(40FY)’가 직장인 1000명을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20~30대의 절반가량이 번아웃 상태였다. 전 연령대 중 ‘번아웃 심각군’으로 분류된 비율이 30대(56.4%)와 20대(40.5%)가 가장 높았다. 기성세대인 50대 이상(25%)의 2배가량 된다.

특히 우울과 불안을 느낄수록 번아웃 확률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각각 83%, 69% 높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대 우울증·불안장애 환자는 2017년 13만 명에서 2021년 28만 명으로 급증했는데, 이는 번아웃 청년도 그만큼 많아졌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20~30대의 번아웃이 심각한 원인은 뭘까.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를 ‘하이텐션(high tension·고도불안) 사회’의 병폐라고 지적했다. “과거에 대한 불신, 현재의 불만, 미래를 향한 불안 등 ‘3불’이 청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김문조 교수는 “내일이면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으면 좌절에 빠질 일도 적을 것”이라며 “쪼그라든 사회적 기회구조와 해소되기 힘든 양극화가 청년들의 번아웃을 부추긴다”고 했다. 김종길 교수도 “청년층의 고용불안이라는 보편적 상황과 청소년기의 과도한 입시 스트레스까지 결합한 한국만의 굴절된 사회현상”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번아웃을 넘어 아예 일할 의지마저 사라진 청년들이 늘고 있다. 지난 20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구직활동을 포기하고 그냥 ‘쉬었음’이라고 답한 청년층(15∼29세)은 49만 명에 달했다.(2월 기준) 2003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치다. 2019년 38만 명, 2020년 43만 명, 2021년 44만 명, 2022년 45만 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이제 청년들의 번아웃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봐야 한다. 누구보다 진취적이어야 할 미래세대가 사회생활의 시작부터 번아웃 상태라면 개인과 국가의 발전에 큰 해가 된다. 김문조 교수의 말처럼 과거에 어려웠고 현재가 힘들어도,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만 있다면 번아웃은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기득권의 벽을 낮춰 청년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공정한 시스템으로 청년과 사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교집합을 넓히는 것도 필요하다. 예기치 못한 시련 앞에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관용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를 실천한 정치적 리더십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내년 총선과 공천에만 관심이 쏠려 있고, 청년과 미래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 연금개혁을 추진한 이유로 “아이들에게 공정하고 견고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정치 지도자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글=윤석만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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