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나이키는 다시 날았다…조던과 함께

이종길 입력 2023. 3. 2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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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어' 1980년대 초 위기 직면한 나이키
스카우트 바카로, NBA 데뷔 앞둔 마이클 조던 주목
어머니·회사 사장 설득…분산 투자금 250만 달러 올인
스포츠 스타 내세운 기업 홍보 최고 성공 사례로 꼽혀

기업은 브랜드 인지도, 고객과의 관계, 매출 등을 높이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마케팅에 활용한다. 영화·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내세우거나 인기 연예인, 스포츠 스타를 후원해 이들의 개성과 특징을 기업·브랜드 이미지와 제품 홍보에 접목한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례는 나이키의 '에어 조던'이다.

1980년대 초 나이키는 위기에 직면했다. 푸마 등을 제치고 주류 반열에 올라서자마자 또 다른 경쟁자를 맞닥뜨렸다. 1979년 미국에 상륙한 리복이다. 폴 파이어맨 최고경영자(CEO)는 신흥시장인 에어로빅을 공략해 큰 재미를 봤다. 인기 강사들에게 신발과 옷을 무료로 제공해 4~5년 만에 마흔 배 이상 매출을 기록했다.

나이키는 리복을 따돌리려고 새로운 시장을 모색하다 미국프로농구(NBA)에 주목했다. 흑인 선수 일색이라서 큰 인기를 끌진 못했으나 인간 장대들의 활약으로 조금씩 시청률이 오르고 있었다. 나이키는 1984년 데뷔를 앞둔 마이클 조던을 눈여겨봤다. 적자를 면치 못해 깎아오던 홍보비를 대폭 높이며 승부를 걸었다.

벤 애플렉이 연출과 연기를 겸한 '에어'는 당시 협상 과정을 흥미롭게 조명한 영화다. 주인공은 나이키 스카우트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 아디다스와 컨버스를 제치고 조던을 포섭하는 주역이다. 일찍이 비범한 재능을 포착하고 조던의 어머니 델로리스 조던(비올라 데이비스)과 나이키 회장인 필 나이트(벤 애플렉)를 동시에 설득한다. "선수를 찾았어요. 이번엔 느낌이 좋아요." "신인을?" "네!" "NBA 코트에 발도 못 들인 선수를?" "그런 게 바로 신인이잖아요."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애플렉 감독은 갖가지 실화를 영화에 맞게 변형하고 축약했다. 바카로가 조던의 활약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반복 재생하는 모습이 대표적 예다. 텔레비전에선 1982년 루이지애나 슈퍼돔(현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전미대학체육협회(NCAA) 농구 토너먼트 결승 경기가 재생된다.

조던과 제임스 워디를 앞세운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은 패트릭 유잉과 슬리피 플로이드가 버틴 조지타운대학과 맞붙었다. 경기는 막상막하의 접전으로 흘렀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은 막바지에 조던이 레이업 슛을 성공시켜 61-58로 앞섰으나 유잉과 플로이드에게 연속 실점해 61-62로 역전당했다. 종료 32초를 남기고 딘 스미스 감독은 작전 시간을 요구했다. "워디나 (샘) 퍼킨스 쪽을 보는 척하면서 건너편에 있는 조던에게 패스해."

경기가 속개되고 선수들은 작전을 그대로 이행했다. 조던은 종료 15초 전 골대 좌측 5m 거리에서 지미 블랙의 패스를 받아 수비 방해 없이 점프슛을 던졌다. 철썩하는 그물망 소리와 함께 경기장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CBS 캐스터로 경기를 중계한 빌리 패커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거의 오픈 슛이나 다름없었죠. 뭐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누가 어떻게 작전을 짜서 그 슛을 만들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조던은 줄곧 자기한테 공이 오길 원했고 직접 슛을 던질 거라고 마음먹었으니까요. 그 슛은 이 시대의 위대한 전설이 시작된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어요. 어떤 선수들은 수비 하나 없는 오픈 슛 기회가 와도 슛을 못 넣기도 하고, 그런 상황에서 슛을 주저하기도 해요. 조던은 그 기회를 계속 바라고 있었고, 결과는 다들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그 순간에는 망설임도 없었고, 불필요한 동작도 하나 없었어요. 그저 공만 오면 자기가 바로 해결하겠다는 태세였죠. 그때도 조던의 승부욕은 그만큼 강했던 거예요."

우승이 확정되자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선수들은 방방 뛰면서 기뻐했다. 토너먼트 최우수선수는 워디에게 돌아갔다. 조던은 신발을 벗고 탈의실 사물함 앞에 앉아 NBC 기자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마지막 슛을 던질 때 어떤 기분이었냐는 질문에 조용히 답했다. "압박감은 전혀 없었어요. 그건 위크사이드(공이 없어 수비가 약한 지역)에서 늘 던지던 점프슛이었으니까요."

애플렉 감독은 일련의 과정을 생략한다. 조던의 마지막 슛만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보여준다. 조던에게 해결사 역할이 주어진 걸 간파하는 얼굴로 바카로의 선견지명을 가리킨다. 남다른 지혜는 결코 텔레비전 앞에서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부단한 노력과 인내의 산물이다.

바카로는 스물네 살이던 1964년 농구계에 투신했다.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팻 디시저와 함께 피츠버그에서 대퍼 댄 라운드볼 클래식 대회를 열었다. 행사는 고교 농구계의 올스타들이 모여들면서 대대적으로 주목받았다. 대학 감독들은 우수한 신예를 스카우트하는 기회를 얻었고, 바카로는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나이키 주요 임원이던 롭 스트라서는 특별한 행보를 주목하고 입사를 제안했다. 은행 계좌에 3만 달러를 입금하고는 대학 농구부 감독들과 후원 계약을 맺으라고 주문했다. 바카로는 각 팀 감독을 찾아가 계약서에 서명받았다. 수표를 건네고 선수들이 신을 운동화를 공짜로 보냈다. 1978년 인디애나주립대의 래리 버드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에 등장하자 신뢰도는 대폭 상승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조던을 눈여겨봤다. 별다른 친분은 없었다. 스미스 감독이 컨버스에서 후원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던이 가장 좋아하던 브랜드는 아디다스였다. 상자에서 바로 꺼내 신어도 발이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신발을 애써 길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 그래서 연습 때는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정규 경기에서는 팀의 규칙대로 컨버스 신발을 신었다.

바카로는 조던의 농구 실력이 여태 본 어떤 선수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했다. 리더 역량까지 갖춰 농구화 마케팅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이끌 인물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스트라서를 비롯한 나이키 간부들에게 후원 계약은 물론 그를 주제로 한 제품군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조던이 4학년 시즌을 거르고 NBA로 진출할지 정하지 않은 때였다.

당시 프로농구선수와 스포츠 기업이 맺은 후원 계약 규모는 1만 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LA 레이커스의 카림 압둘 자바 정도만 연간 10만 달러를 벌었다. 바카로는 나이키가 젊고 유능한 선수 여러 명에게 분산 투자하려고 한 250만 달러를 모두 투자하자고 주장했다. 롤랜드 레이즌비가 쓴 '마이클 조던'에서 당시를 이렇게 되짚었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그때는 마이클이 특별히 눈에 띄지도 않았고 대중적인 우상이라 하기도 어려웠죠. 실력은 좋았으나 그저 딘 스미스의 팀에서 뛰는 선수 정도로만 인식됐거든요. 그때 내 요지는 말이죠, 우리한테 있는 자금을 다 털어서 마이클한테 주자는 거였어요. 스트라서가 제 말을 유심히 듣더니 '지금 직위를 걸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디다. 저는 빙긋 웃으면 답했어요. '당연하지.'"

'에어'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은 조던 가족 설득이다. 바카로는 거의 모든 협상을 델로리스와 협의한다. 실제로는 올림픽대표팀 코치였던 조지 레이블링의 주선으로 조던을 먼저 만났다. 조던은 나이키라는 브랜드를 전혀 몰라서 시큰둥했다. 바카로도 진지하게 신발을 이야기할 때 별안간 자동차를 달라고 요청해 건방지다고 여겼다. 계약이 성사되면 백만장자가 될 거라고 해도 조던의 최대 관심사는 새 차였다.

"그때 조던은 진짜 상대하기가 까다로웠어요. 일단 돈 계산을 전혀 안 했거든요. 또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을 나왔다 뿐이지, 여전히 어린애 같았죠. 기본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었고, 1980년대에는 신발 계약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그런지 내 얘기에 전혀 관심을 안 보였어요. 게다가 녀석은 나이키가 아니라 아디다스로 가길 원했죠. 그 시절에는 아디다스 운동복이 제일 끝내줬거든요."

바카로는 미국 올림픽 농구대표팀이 금메달을 딴 다음 날 조던을 다시 만났다. 계약 보증금과 계약 체결 보너스, 매년 지급할 비용을 합쳐 5년간 250만 달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에어 조던 농구화의 광고도 제작하기로 약속했다. 전례가 없는 특별대우였다. 특히 에어 조던이 한 켤레 팔릴 때마다 로열티를 25%씩 준다는 조항이 그랬다. 조던은 그 외의 나이키 에어 운동화에 대해서도 로열티를 받기로 돼 있었다.

나이키가 내건 조건에 대해 레이즌비는 '마이클 조던'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기업의 사활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조던은 1970년대의 향락 문화와 코카인에 찌든 NBA에서 경영 실적이 엉망인 구단 소속으로 아직 정식 데뷔조차 하지 않은 신인에 불과했다. 당시 시카고 불스에는 코카인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고 찬양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만약 나이키가 사전에 정식으로 이 사업의 위험성을 평가했다면 조던과의 계약을 즉각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은 애초에 확실한 사업 계획 없이 순전히 소니 바카로의 직감에 따라서 시작된 것이었다."

애플렉 감독은 로열티 등 나이키의 일부 조건을 델로리스가 제안하는 형태로 각색했다. "신발은 신발일 뿐이죠." "내 아들이 신기 전까지는요." 그녀가 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카로는 "자기 아들의 인생을 걸고 담판을 벌이는 사람이었다"며 "조던은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이 사람들이 널 사업 동반자로 원하고 있어'라는 말에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애플렉 감독은 이보다 더 주체성을 강화해 정신적 지주처럼 표현했다. 무슨 이유일까.

이전에도 미국에는 한 시대의 우상이라 일컬을 만한 흑인 선수들이 여럿 있었다.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인 재키 로빈슨을 비롯해 홈런 타자 윌리 메이스, NBA의 전설인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 미식축구 영웅 짐 브라운, 영원한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 등이다. 하나같이 곳곳에 만연했던 인종 차별과 흑인 시민권 운동이라는 시련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하지만 광고계는 단 한 번도 이들을 마케팅 활동의 주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조던은 나이키와 첫 거래를 함으로써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만큼 막대한 경제력을 얻었다. 애플렉 감독은 델로리스의 교육과 헌신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레이즌비처럼 그녀를 '블랙파워의 근원지'로까지 생각한다. 인종 차별에 맞선 저항 이상의 의미로.

"블랙파워의 근원지는 그 옛날 백인 우월주의 세력이 폭력을 동원해 흑인을 정치와 사회 활동에서 배제했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코스털 플레인(Coastal Plain)이었다. 델로리스 조던은 이 개념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았고 그 토대는 소작농업을 통한 경제적 자각에 있었다. 경제력은 과거에 흑인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으로, 흑백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에 애틀랜타나 더럼에서 번창했던 흑인 소유의 은행이나 소기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때 흑인 기업가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벌어들인 이익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축적한 부는 흑인 사회의 핵심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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