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우물 안 야구, 우물 안 야당

서승욱 2023. 3. 2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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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논설위원

29세 MVP가 던진 슬라이더가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꽂혔다. 마이크 트라우트의 방망이는 허공을 갈랐다. 2023년 WBC의 지배자는 일본 야구 대표팀 '사무라이 재팬'이었다. 9회 말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를 썼던 멕시코와의 준결승에 이어 세계 최강 미국까지 결승에서 격침했다. 야구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가 우승을 확정한 뒤 포효하는 장면이 솔직히 부러웠다. 모든 신문이 일제히 호외를 발간하는 등 일본 열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WBC에서 투타에 걸쳐 맹활약한 일본의 오타니 쇼헤이. [연합뉴스]

WBC를 향한 일본 국민의 간절함은 지난 2월 중순 후쿠오카(福岡) 출장 때부터 느껴졌다. 개막까지 20일이나 남았지만 일본 지상파 TV 대부분의 톱 뉴스는 '사무라이 재팬'의 캠프가 차려진 미야자키(宮崎)발이었다. '영웅' 오타니가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이지만, 다른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려고 수많은 야구팬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투수진의 리더인 다르빗슈 유를 비롯해 출퇴근하는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팬들이 1만8000명을 넘었다. 캠프 주변의 호텔 방이 동나는 등 주변 지역 경제가 특수를 누렸다.

「 WBC서 확인된 한국 야구 위기
약점 방치하다 '참사' 때만 요란
민주당 한·일관계 대응과 유사

한국과 일본 야구의 저변을 비교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 효고(兵庫)현 니시노미야(西宮)시 고시엔(甲子園)구장이다. 4000개에 가까운 일본 전국의 고교 야구팀 중 32개교(봄), 49개교(여름)에만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 100년 전통의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무대다. 예선 바늘구멍을 어렵게 통과한 낙타들은 고시엔 본선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탈락한 선수들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구장의 흙을 파 고향에 담아가는 게 이 대회의 전통이다. 고교 시절 시속 160㎞를 던져 일본 열도를 흥분시켰던 오타니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고시엔을 동경했거나 고시엔을 밟으며 성장한 이들이 일본 팀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실력도, 그들이 '다마시(魂·혼)'라고 부르는 정신력도 이렇게 길러졌다. 저변이 탄탄한 학생 야구, 수준 높은 국내 프로리그, 야구에 대한 국민적 자부심과 열정은 일본 야구를 떠받치는 강력한 축이다. 이번 우승은 이런 요소들이 긴 세월 쌓인 결과다. 한두 달 반짝 연습하고 국민들의 반짝 응원으로 성취할 수 없다.

슬픈 일이지만 이번 대회를 거치며 드러난 한국 야구의 수준은 적나라했다. 느린 볼 스피드에 스트라이크조차 못 던지는 투수들, 기본을 잊은 수비, 황당 주루와 정신력 부재, 이런 선수들에게 100억원 이상을 베팅하는 우물 안 리그, 세대교체 실패, 육성보다 외국인 선수에게 목을 매는 풍토, 고교 팀 수가 88개에 불과한 학생 야구의 얇은 저변, 혁신을 이끌 리더십의 부재 등이 확인됐다. 평소엔 무관심하게 방치하다 이번과 같은 대형 참사 때만 끓어오르는 야구 문화, 야구팬 문화 역시 안타깝다.

WBC만큼이나 한·일 양국을 뒤흔들었던 징용 해법과 양국 관계 이슈도 한국 야구 문화와 닮은 구석이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넘긴 듯 반발하고 있는 왕년의 집권당, 민주당의 태도가 특히 그렇다. 필자가 주일 특파원을 지냈던 2017년 말부터 3년간 한·일 관계는 정말 최악이었다. 위안부 합의의 사실상 파기,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등으로 그야말로 엉망이 됐다. 민주당 출신 문희상 국회의장의 중재안에 일본 정치인과 관료들은 "어떻게든 탈출구를 만들자"고 의욕을 보였지만 문재인 정부가 요지부동이었다. ‘토착 왜구’와 ‘죽창가’로 상징되는 대일 강경론으로만 일관하면서 ‘국내 정치용 반일 몰이’로 한·일 관계를 5년 내내 방치했다. 그렇게 무책임했던 그들이 이제는 "외교 대참사"라며 냄비처럼 끓어오른다. 한·미·일, 한·일 협력의 중요성이 커지는 국제 정세도 우물 안 그들에겐 딴 세상 얘기다. 한국 야구든, 한국 야당이든 이러면 답이 잘 안 나온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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