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공영방송 지배구조 법안’ 일방 처리 유감

2023. 3. 29.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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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일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넷플릭스에서 최근 선보인 ‘피지컬 100’이라는 프로그램이 한국 예능으로는 최초로 전 세계 1등을 석권했다. 축하할 일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만든 곳이 공영방송의 하나라는 MBC였다는 것은 씁쓸하다. 미국의 방송학자 마이클 트레이시는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을 이렇게 구분했다. “민영방송은 돈을 벌기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공영방송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돈을 받는다.” 그런 공영방송이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을 통해 콘텐트를 제공했다는 것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공영방송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민주당, 국민적 합의 없이 강행
공영방송 ‘내 편’ 만들려는 꼼수
독립성·공공성·경쟁력 약화 우려

시론

최근 몇 년간 다양한 미디어 서비스가 등장하고 글로벌 OTT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면서 국내 방송시장은 무한경쟁 상황이다. 공영방송도 시청률 하락, 광고 판매 감소 등 직격탄을 맞으면서 근본적 변화에 직면해 있다. 이렇듯 생존 차원의 공영방송 현안이 산적한 절박한 현실에서 민주당이 갑자기 21일 이른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안’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소관 상임위에서 단독 의결했다. 민주당은 과거 집권당일 때는 지배구조 법안 추진에 미온적이었으나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고 있다. 먼저, 공영방송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영방송의 공적 책무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이에 걸맞은 서비스·재원·인력구조까지 아우른 청사진에 따라 차분히 검토해야 하는데, 그런 공론의 장이 물거품 된 것 아닌지 걱정된다. 특히 MBC의 경우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그 정체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숙제가 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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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느닷없이 이사와 사장 선임 절차만을 개정하려는 것은 정권 교체 이후에도 공영방송을 ‘내 편’에 두려는 꼼수 아닌지 우려스럽다. 지금도 이사 수가 9~11명으로 적지 않은데 이를 21명으로 대폭 증원하면 효율적 운영을 어렵게 할 뿐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방송 미디어 관련 학회와 방송사 시청자위원회, 방송 직능단체에서 전체 이사의 4분의 3이 넘는 16명을 뽑도록 했는데 방송 미디어가 과잉 대표되는 문제도 있다.

특히 거론되는 방송 직능단체들은 정치 성향이 늘 한 쪽에 치우친다는 지적을 많이 받던 곳들이다. 롤모델로 삼은 독일은 공영방송의 운영위원을 선출할 때 방송 미디어뿐 아니라 교육·문화·종교 등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단체들의 추천으로 구성해 국민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민주당 안은 겉핥기로 차용한 듯하다.

또 하나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이런 개정안을 만들고 추진하는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이다. 공영방송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공영방송의 큰 틀을 바꾸는 제도 개선은 당연히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정하는 여러 절차를 거쳐 합의로 처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말 국회 상임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소위원회 논의 시작부터 안건조정위원회 가결, 이번 과방위 단독 의결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야당은 여당과의 건설적인 논의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몰고 갔다.

지난 정권에서 공영방송이 대중을 현혹하는 정치 선동의 도구로 전락한 듯한 사례를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과거를 답습해 공영방송의 영향력을 쥐락펴락하기 위한 법 개정안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공공성은 물론 경쟁력을 약화할 뿐이다. 공영방송이 중심을 잡는 유럽과 일본은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전통적인 공영방송 모델을 탈피하고 시장 경제적 논리를 도입해 새로운 전략과 판짜기를 시작했다. 비효율적인 공영방송만으로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방송산업의 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다.

한국은 시대 흐름에 맞춰 공영방송을 새롭게 정립할 철학과 패러다임이 있는가. 지금은 미래를 대비하는 공영방송의 큰 그림을 국민과 함께 그려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이라도 법안의 일방적 강행을 멈추고, 공영방송이 국민을 위해 새롭게 거듭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꼼꼼하게 살피며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천일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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