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침묵은 등이다
갑자기 개나리가 피고 불현듯 목련이 터져 이른 봄꽃 출렁대는 뉘 집 담 위를 사진 찍어 보냈더니 남쪽 사는 지인의 답장은 돌연히 피었다는 벚꽃 자랑으로 꽤나 분홍분홍했다. 매번 우리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하면 소리 없이 부지불식간에 당도한 봄이고 꽃에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서일 거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당도하니 딱 기다리라는 기별. 봄이 어디 말을 앞세운 적이 있었던가, 꽃은 늘 제때 몸으로 보여오지 않았던가.
이렇듯 침묵을 힘으로 묵묵히 제 책임을 다해내는 자연 앞에 내가 유독 경외로 두리번거리며 좇는 데가 있으니 거기, 등이다. 곡선의 안도랄까, 둥긂의 위로랄까. 위로 산등성이를 올려다볼 적에 아래로 파도의 등줄기를 내려다볼 적에 휘어서 구부러진 굽이, 그 굴곡에 시선을 두노라면 목젖까지 차올랐던 색색의 말이 삼킨 물처럼 희고 투명해지기도 하니 사람들 그렇게들 산으로 바다로 여행들 떠나는 것이겠다.
말다툼 끝에 끊어진 전화에 화를 어쩌지 못하다 뱉는 즉시 칼이 될 말을 참느라 사과 한 봉지를 칼로 다 깎은 적이 있다. 처음엔 한 알 깎아 먹는 일로 입을 다물려 했는데 모기향처럼 원을 그리며 구불구불 깎여나가는 사과 껍질이 참으로 정직하다 싶으니까 여남은 개의 사과를 다 깎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살을 다 드러낸 사과와 속을 다 들켜버린 나의 마주함. 예의 나의 부끄러움은 이내 나의 두려움으로 갈변했다. 예의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했거늘 평생 나는 내 말의 즉흥과 내 말의 도취로부터 어찌 나를 지키려나.
산책하는데 집 근처 작은 텃밭에 쪼그려 앉아 호미질하는 할머니가 있어 한참을 서 훔쳐보았다. 말이 아니라 몸을 쓰는 사람의 등은 알처럼 둥글구나. 할머니의 바지런한 손놀림을 따라 쉴 새 없이 땅을 이는 호미가 흙 속 작은 돌에 부딪혀 캉캉 소리를 내는데 귀가 연신 쫑긋 솟았다. 지금껏 차마 입이 없어 말을 못 한 것은 아니었구나. 자연이 감춘 비밀을 자연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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