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자연에 갇혔다'…나는 농촌에 갇힌 것이 아닐까?”

전정희 2023. 3. 2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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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24)
마음 하나 바꾸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 '마법'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모든 것이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말도 있다.

물 컵에 반쯤 담긴 물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한다는 비유도 있다. 모두 세상살이가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이런 비유를 잊고 살지만, 가끔 마음 깊이 이 말에 머리가 끄덕여지는 경우가 있다. 며칠 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 오랜만에 몸에 힘을 쭉 빼고 우두커니 앉아 밤늦은 시간까지 음악을 들었다.
지리산 자락 매화나무. 집 근처 산책하며 찍었다. 사진=임송

몸에 힘을 빼고 보니 그동안 내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겠더라. 그렇게 무장 해제된 상태로 한참 동안 음악을 듣고 있는데 불현듯 내 마음속에 “내가 상황에 지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생겨났다.

최근에 여러모로 생활에 조화가 깨졌다. 아내나 아이들과의 관계도 매끄럽지 않고 일상생활에서도 활력이 많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절제력이 많이 약해졌고 화도 자주 낸다.

크게 웃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매사 나이를 의식해 움츠러들고 젊은 사람들에게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뉴스를 봐도 하는 꼴들이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속은 항상 흐린 날씨처럼 찌뿌듯하다. 그러니 그런 나를 맨날 옆에서 봐야 하는 아내나 식구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지난주에는 예전 직장 동료를 만나 을지로에서 골뱅이 시켜놓고 맥주 한잔했다, “형님 표정이 외로워 보여요.” “외롭지! 그런데 그게 겉으로도 느껴져요?” “나이가 50이 넘으면 그 정도는 보여요.”

그래서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마음먹어보지만, 얼마 못 가 또 그 타령이다. 그런데 힘 빼고 우두커니 앉아 음악을 듣다 보니 최근의 다양한 부조화 증상들의 근저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 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던 것.

근 10년 동안 비즈니스를 해오면서 내 나름으로는 열심히 한다고 해왔다. 무슨 일이든 10년간 노력했으면 일이 풀릴 때도 됐는데 아직도 매번 그 타령이니 마음에 답답함이 있다.

그런 답답함이 누적되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처한 상황에 먹혀버린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활에 조화가 깨진 시기와 답답함이 누적되어 짜증으로 표출되던 시점이 얼추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에 ‘인투더 와일드’라는 영화를 봤다. 젊은 주인공이 자신의 전 재산을 구호단체에 기부하고 혼자 먼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진솔하게 교감한다.
산책 중 만난 개나리. 울적한 마음이 꽃을 보니 한결 좋아졌다. 사진=임송

그러다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버려진 버스를 발견하고 거기서 생활한다. 주변에서 먹을거리를 채취해 먹고사는데 어느 날 독초를 잘 못 먹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주인공이 숲에서 혼자 죽어가면서 일기에 썼던 말, “나는 자연에 갇혔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농촌에 갇힌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으니,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떠밀려가고 있었던 것이 맞는 것 같다.

사실 비즈니스가 잘 풀려서 회사가 팡팡 돌아가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면 지금의 여러 부조화 증상들이 괜찮아질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도 모를 비즈니스 성공만을 기다리면서 지금의 이 답답한 현실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상황이 초래된 이유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황에 압도되어 발생한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주변 일들을 하나씩 단단히 챙겨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신기하게도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집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다. 지난해 집 근처로 옮겨 심은 개나리도 노랗게 폈고 집 뒷산 언덕배기에는 진달래도 활짝 폈다. 바로 엊그제 폭설로 고립됐던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싱그러운 봄날 아침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마음 하나 바꿔 먹었을 뿐인데 이 세상이 이렇게 달라 보이다니.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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