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의대 새로 만든다고 의사과학자 나오나
KAIST와 포항공대에 의대를 신설하는 방안이 최근 거론되고 있다. 정부가 첨단 바이오산업 육성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사과학자’ 양성을 강조하자 나온 대책 차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취지는 맞지만 방법은 틀렸다.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이미 운영 중인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정비·확장하고 정부 지원을 늘리는 것이다.
현행 의사과학자 양성에는 네 가지 트랙이 있다. 첫째, 전문의 수련을 마친 의사가 생명공학과에서 연구 훈련을 받은 뒤 병원이나 의대에 취업해 임상 진료 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방법이다. 서울아산병원이 수년 전부터 업무협약을 맺어 전문의가 KAIST에서 수년간 연구를 진행한 뒤 병원으로 돌아와 연구를 지속하는 경우다. 이미 십여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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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IST·포항공대 의대신설 거론
기존 프로그램 정비·확장해야
연구비 늘리고 신분 보장 필요
」
둘째, 대학에서 기초과학이나 생명과학을 공부한 후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서 의학 공부를 마친 뒤 연구에 전념하는 경우다. 차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이런 트랙으로 이미 의사과학자들이 성공적으로 양성되고 있다. 셋째, 의대 졸업 후 곧바로 의대 기초교실 또는 KAIST 등 과학기술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해 의사과학자가 되는 길도 있다. 지난 수십년간 해온 방식이다.
넷째, 최근 울산의대가 새로 시도한 방법도 있다. 예과 학생들이 울산과학기술대학(UNIST)과 학점 교류를 통해 기초과학을 공부하는 제도다. 저학년 시절부터 진로를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이미 괜찮은 성과를 내고 있고 전망도 밝다.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지원·육성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가장 절실한 육성 방법은 정부가 의사과학자 지망생에 대한 연구비 지원과 신분 보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민간 병원의 속성상 환자 진료를 통해 수익을 내지 못하고 연구만 하는 의사과학자는 경영에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려다 병원 경영이 어려워지면 이들에게 진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의사과학자 양성을 추진하는 병원과 의대에 정부가 일정 부분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
해마다 가장 똑똑하다는 학생 약 3000명이 의대에 진학한다. 이 가운데는 분명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젊은이도 포함됐을 것이다. 인공지능(AI) 같은 미래 기술을 개발해 인류 문명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켰을 뻔한 젊은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재능을 갖춘 인재가 의사가 돼 임상 진료에만 종사한다는 것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 낭비일 수 있다. 이런 인재들은 환자 한 사람을 치료하는 것보다 연구에 매진해 더 많은 환자에게 건강을 되찾아 줄 학술적 성과를 내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의과학·의공학의 무한한 경제적 부가가치까지 따진다면 더더욱 그렇다.
의대 신설이 뜨거운 논란이 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좀 단순화하자면 의대 신설은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의 득표를 위한 단골 공약 사업에 불과하다. 의대를 아무리 새로 세운들 졸업생이 의사 면허증을 딴 뒤에 임상 진료를 포기하고, 의과학 연구에 몰두하도록 강제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인기 진료과 개원의 숫자만 늘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자진해서 의사과학자가 되겠다는 인재를 지원하는 방안과 의과학에 별 관심 없는 젊은이에게 의대에 보내줄 테니 개업하지 말고 연구만 하라고 강제하는 방안 중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이겠나. 정치인들은 의대 설립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의대 설립에 드는 비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의대 설립은 단과대학 하나 설립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힘든 작업이다. 의대 한 곳당 교수 숫자만 해도 적게는 140명에서 많게는 840명이나 된다. 의대 신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의대를 만들었지만, 교수진과 수련병원이 없어 결국 폐교된 서남의대 사례가 입증한다. 의대 설립 비용의 일부만 들여도 이미 스스로 의사과학자의 길을 선택한 인재들을 지원할 수 있다.
정치권의 의대 신설 논란은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의대생과 수련의 중에도 의사과학자의 길을 가길 원하는 인재는 많다. 내 집 마당에 사과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는데 그 나무에 거름 줄 돈으로 집 밖에 땅을 사 새 사과나무를 심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인숙 울산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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