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아이가 무너졌다?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입력 2023. 3. 28. 00:54 수정 2023. 3. 28.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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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한’ 행복, ‘그을린’ 행복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아이가 임신했다. 이 아이는 죽을죄를 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소년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그 친밀감 속에서 청소년이 되었고, 그러다가 성교를 하고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강제는 없었다. 성욕은 타고난 것이었고, 애정을 느끼는 상대에게 발현되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무인도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거다. 그 사회는 그 소년 소녀에게 일정한 생애주기를 제시하고 따르기를 권한다. 그 생애주기에 따르면, 입시를 앞둔 청소년은 아이를 가지면 안 된다. 이른바 앞날을 망치게(?) 되므로. 혹은, 적어도 태어날 아기를 자력으로 키울 수 없으므로. 사회가 권하는 생애주기를 따르지 않은 이 소년 소녀에게 이제 사회의 직간접적인 제재가 시작된다.

「 사람들은 종종 좌절하기 마련
그렇다고 삶이 끝나는 것일까

무너진 자신을 방치할 것인가
전능한 타자를 기다릴 것인가

일본영화 ‘해피아워’의 긴 여운
서로 기대며 일어서는 사람들

일정한 생애주기 강요하는 사회

30대 후반의 친구 넷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탐색한 영화 ‘해피아워’.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부모들은 소년 소녀가 그저 아이를 낳게 두지 않는다. 무사히 공부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취직하고, 정상인처럼 보여서, 결혼하고, 그런 다음에 아이를 갖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이 소년 소녀에게 닥칠 상황을 우려하기에 어른들은 개입한다. 도대체 어쩌다 이랬니. 도대체 생각이란 게 있는 거니.

결국 소년의 엄마와 할머니가 소녀의 부모를 찾아가서 돈과 편지를 주고, 조아리며 사죄한다. 마치 죽을죄를 진 것처럼. 아마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을 소녀의 부모는 말이 없다. 단지 당부한다. 다시는 둘이 만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이제 입시에 신경 써야 할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혼쭐이 난 죄인의 모습으로 귀가하며, 소년의 할머니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린다. 둘이 좋아한 건데, 왜 어느 한쪽만 죄인이 되는가.

이 임신 사실이 어떻게 어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소년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낙태 비용을 달라고 한 것인지, 도주 비용을 달라고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을 다그친다. 상대의 몸을 먼저 생각했어야지! 그리고 그런 돈을 엄마에게 달라고 해? 나 때는, 그 정도 돈은 친구들끼리 빌려줬다. 너는 친구도 없냐!

책임 있는 인간은 누구인가

예상 못 했던 임신으로 말미암아, 확고해 보였던 가정의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니 이미 가 있던 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먼저, 청소년은 가출을 꿈꾼다. 아이를 가진 소녀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권한다. 아마도 이 소년은 마냥 무책임한 소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를 가졌다고 도망치는 일부 코피노 아버지 같은 사람은 아니다. 어른들이나 쓸 법한 어려운 단어를 종종 쓰는 소년이다. 그런 단어를 곧잘 쓰는 아이는 어떤 사람일까? 조숙한 아이일까? 거의 어른인 것일까? 아니, 그저 어려운 단어를 쓰는 아이일 뿐이다.

소녀를 방치하는 대신 같이 도망가자고 했다고 한들, 이 소년이 책임 있는 인간이란 말은 아니다. 항구에서 만나기로 한 소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저 어린 소년을 따라 먼 곳에 가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마도 그것이 그들 관계의 종말일 것이다. 그 임신한 소녀의 마음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정보가 없다. 일단 소년을 따라가 보자.

남겨진 소년은 자전거를 끌고 마을을 걷는다. 그 옆을 걷던 소년의 엄마가 아들에게 말한다. “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이 엄마는 아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감싸고 드는 여느 엄마와는 다르다. 엄마로서 왜 그토록 심한 말을 아들에게 했을까. 엄마는 그에 대해 부연하지 않는다. 아마도, 자기 경험을 반추함에 통해 인간의 행불행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은 삶에 박힌 ‘구겨진 자국’

실로, 저 소년은 아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의 천진하고 해맑은, 그리하여 약간 기괴하기까지 한, 그런 행복은 이제 느낄 수 없게 될 것 같다. 세상에 대한 열패감, 자신이 벌인 일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괴감,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졌다는 상실감이 오랫동안 조용히 따라다니겠지.

이것이 꼭 저 소년이 불행할 거라는 말은 아니다. 세계라고 부르는, 한 개인보다 훨씬 큰 어떤 것이 저 소년을 움켜쥐고 힘껏 구겨 놓았다. 이제, 저 아이는 평생에 걸쳐 그 구겨진 삶을 천천히 다시 펴야 하겠지.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구겨버렸다고 해서, 그냥 구겨진 대로 살다가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은 아니다. 시간이 걸리겠지. 끈기 있게 펴다 보면, 어느 날 구겨진 것을 마침내 다 펼 수 있을 것이다.

다 폈다고 한들 구겨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구겨졌던 자국이 남는다. 따라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의 천진하고 해맑은 행복 같은 것은 끝난 것 같다고 한 것이다. 다시 펴졌지만, 구겨진 자국이 남아 있는 상태,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한 번도 구겨진 적이 없는 상태와도 다르고, 구겨진 상태로 그냥 있는 상태와도 다른 제3의 상태. 이 상태를 두고 행복이란 말을 써도 좋겠지만, 세상에는 구김 없는 상태를 일러 행복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겠지. 성숙? 어른의 행복? 인간의 행복? 그늘진 행복? 그것도 아니면 그을린 행복?

“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 뒤, 엄마는 곧이어 사과를 한다. 내가 심한 말을 했구나, 엄마 아빠에게 크게 기대하지 마라. 우리도 아이 같은 존재들이다…, 어쩌고저쩌고. 이것은 자기변명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한계에 대한 자인이다. 어떤 사태에 대해 자기 책임은 전혀 없다는 듯, 상대편 비방에 골몰하는 것을 보는 일은 괴롭다. 한계의 자각은 비방보다 성찰적이고 현실적이다.

두 사람이 함께 일어서는 법

소년의 아빠도 아이 같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가족과 대화를 잘 나누지는 않지만, 건전한 사회인으로서 평화로운 가정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다. 다부진 사람이다. 그는 회사 일에 바빠 소녀 집에 찾아가 사죄할 겨를이 없다. 이 일을 계기로 소년의 엄마는 자기 가정의 공허함을 깨닫는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과 잠자리를 한 다음 날 아침, 남편에게 말한다. 나는 외도를 했고, 그에 대해 당신에게 사과할 생각 같은 건 없다고. 남편은 그 말을 듣고도 의연한 척 출근한다. 그러나 횡단보도 앞에서 끝내 길을 건너지 못한다. 주저앉는다. 그 강건한 육체를 가진 사람도 서 있지 못한다. 무너진다.

무너진 사람은 어떻게 다시 일어나야 하나. 소년의 엄마가 참가한 ‘중심’이라는 워크숍에 나름의 답이 있는 것 같다. 폐허가 된 해변에 가구들을 다시 세워 놓은 것으로 알려진 예술가가 진행하는 워크숍이다. 그는 다시 세우는 일의 전문가다. 그에 따르면, 잘 서 있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을 알아야 한다. 둘 이상의 사람이 손을 짚거나 벽에 기대지 않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타인과 등을 맞대고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상대에게 적절히 기대고 있으면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 생겨서, 그 힘을 타고서 일어나면 된다는 것이다. 해보시라. 정말 된다. 상대에게 너무 기대거나, 혹은 상대를 받아주기만 하면 균형점이 생기지 않는다. 다시 무너진다. 존재의 무게를 잘 주고받아야 한다. 그래야 두 사람 다 일어설 수 있다.

이 예술가는 꽤 모호한 인물이다. 도인 같기도 하고, 사기꾼 같기도 하다. 그는 심리적 위기에 빠진 인물에게 다가가, 함께 도망칠까요? 라고 느닷없이 말하곤 한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같은 반응을 얻기도 하지만, 그 과감한 발언을 계기로 해서 기꺼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도 생긴다. 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해피아워’는 5시간 17분에 걸쳐 많은 사람의 삶이 무너지고 있음을, 혹은 이미 무너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중심’ 워크숍은 이 영화가 삶의 부정적인 면만을 늘어놓다가 끝나는 게 아님을 말해준다.

구겨진 마음을 다시 편 사람들

인간은 어느 시점엔가 삶이라는 해변에 무너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곧 폭풍우와 해일이 밀려올 텐데. 그대로 무너져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전능한 존재가 자신을 들어 올려주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서로의 등을 밀착시키고 주춤주춤 일어설 것인가. 이렇게 일어나는 상상은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한 나머지 절대 권력을 만드는 상상이나, 압도적 강자가 약자를 구원하는 상상이나, 타인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는 상상이나, 권위적 지도자에 순종하는 양떼의 상상과는 다르다.

모두 무너졌지만, 서로에 기대어 일어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구겨진 마음을 편 사람, 좌절했다가 회복한 사람,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스스로 서게 된 사람이다. 어느 시점엔가 삶이라는 해변에 무너져 있는 상태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고급 신축 아파트 단지 홍보 전단에 갓 인쇄된 것 같은 과시적인 행복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 그을린 행복, 그래서 인간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상태에는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건 말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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