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의 이코노믹스] 제조업 강국만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입력 2023. 3. 28. 00:52 수정 2023. 3. 28. 06: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비스산업의 글로벌 도약을 기대하며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2011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실리콘밸리 기업가들과의 만찬장에서 환담이 오갔다. 오바마가 스티브 잡스에게 물었다. “아이폰을 왜 미국에서 만들 수 없는가?” 잡스 특유의 냉소적인 답이 돌아왔다.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미국 정치의 유리 천장을 깬 오바마는 재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대선의 판도를 가르는 것은 미국 중서부,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표심이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됐을 때 백악관 주인으로 선출된 오바마는 미국 제조업의 일자리 확대에 공을 쏟았다. ‘비즈니스 유턴(Business U-turn)’, 즉 미국을 떠난 제조업을 다시 미국으로 유치하는 건 오바마 행정부의 미 제조업 살리기 전략인 동시에 선거 전략이었다. 그런 오바마의 셈법을 모를 리 없는 잡스가 “꿈 깨라”고 찬물을 뿌린 것이다.

‘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 assembled in China(캘리포니아 소재 애플이 디자인하고 중국에서 조립하다).’ 아이폰 뒷면 커버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귀는 기술을 정점에 앞세운 아이폰의 글로벌 공급망 선언이다. 기술만 미국이 가지고 조립은 외국에 맡기는 것은 세계화 시대를 지배한 이윤 창출공식이었다. 모두 그 공식을 따라 하려는 열기 속에 제조 역량은 미국을 떠나 외국으로 나갔다. 엄청난 속도와 그에 버금가는 숫자로.

「 신냉전·인구절벽·기후변화 대응
선진국과 제조업 경쟁으론 한계

제조업 비중 OECD 평균의 2배
일자리는 서비스업서 70% 이상

관광서 경제활로 찾은 일본처럼
서비스산업 글로벌화 빅뱅 필요

미·중 대결 속 ‘묻지 마 세계화’ 종언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바마도 못해 낸 것을 바이든 대통령은 해낼 기세다. ‘묻지 마 세계화’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돈의 색깔’을 따지는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기술만 가지면 체제 차이를 따지지 않고 전 세계의 소재 공급자와 조립자를 연결했던 공급망이 삐걱거리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조립 생태계의 해결사 중국은 더는 과거 위상을 누리기 어려운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으로 시작된 미국의 중국 견제는 바이든의 중국 기술패권 저지로 이어지고 있다. 자동차·스마트폰·의료장비 등 일상생활에서부터 항공기·레이더·슈퍼컴퓨터 등 안보에 이르기까지 그 핵심에 있는 반도체가 미·중 대립의 주요 전쟁터가 되었다.

바이든은 반도체산업의 공급망을 미국에서 시작하여 미국 내에서 완결 짓는 것으로 새로 구축하려고 한다. 제조역량 생태계가 홀연히 사라진 미국에서 그런 마술이 가능할까. “동맹국의 투자를 미국에 유치하라”는 요술 방망이를 미국은 휘두르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선두주자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파운드리의 최강 대만 TSMC. 미·중 패권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새로운 공장 건설의 삽을 떴다. TSMC도 애리조나에 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공장 건설 비용과 운용 비용의 상승을 예감했지만, 더 긴 안목으로 전략적 선택을 했다.

동맹국 기업들의 투자 유치를 위해 미국은 보조금과 수출통제라는 당근과 채찍을 흔든다. 지난 겨울, 미국은 일본과 네덜란드를 압박하여 핵심 장비의 중국 수출 통제 합의를 끌어냈다. 석유 수입보다 반도체 수입액이 더 많은 중국엔 치명타다. 미국이 주겠다는 보조금은 진짜 보조금인지 갈수록 의구심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보조금을 받으면 향후 10년간 중국 투자는 금지된다. 생산시설 공개, 초과이익 공유 등 수상한 조건들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민주주의 국가 간의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을 때의 그 비장함이 갑자기 초라해진다. “이쯤 되면 미국이 중국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투자를 인질로 기술 이전을 압박했던 중국을 비난하던 그 미국은 어디로 갔나.” 성난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정부, 수도권 첨단산업단지 승부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한국 제조업의 항로 앞에 세 개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신냉전의 파도, 인구절벽의 파도, 기후변화의 파도다. 미·중 신냉전의 도래는 중국의 추격에 쫓기던 한국에 시간을 벌어주는 기회라고 한다. 저출산 고령화는 비좁은 국토에서 치열한 인구압박과 경쟁에 시달려온 한국인들에게 라이프 스타일을 바꿀 기회라고 한다. 기후변화는 화석연료 중심 제조업 강국에서 친환경 제조업 강국으로의 변신의 기회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미래를 앞서 가본 선지자일까. 기회를 포착하려면 기민해야 하고 변화를 실현하려면 거의 혁명적인 노력이 있어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최근 정부가 발표한 수도권 첨단산업단지 조성 구상은 신냉전 시대 진퇴양난의 고뇌에 처한 한국 제조업의 고민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보와 연계된 핵심 제조업의 중국 투자는 지속하기 어렵고 미국 투자도 까다로운 상황에서 핵심 생산역량을 대한민국 내에 확보하는 것은 주권국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미래를 걱정한다면 여기에만 머물 여유가 없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세계 주요 선진국이 보조금을 앞세워 집 나간 제조업 찾아오기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과 같은 게임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 신냉전본격화 시대에서 경제안보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자국의 통제영역 안에 제조업 역량을 확보하려는 선진국의 움직임은 그들의 숙제를 푸는 것이다. 제조업 역량을 갖춘 한국은 초격차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다른 선진국에 비해 취약한 산업구조의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서비스산업 비중 낮고 생산성도 열악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세계 수준의 제조업에 비해 후진적인 서비스산업은 한국산업 구조의 오래된 약점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대비 제조업 비중은 25%. G7의 어느 국가보다 높고, OECD의 모든 회원국보다 높다. 독일 19%, 일본 20%, 미국 11%, OECD 평균 13%와 비교해 보라. 반면 서비스산업의 GDP 비중은 한국 57%, 일본 69.5%, 독일 62.9%, 미국 77.6%, OECD 평균 71%다(세계은행 2021년 통계). 한국 내 일자리의 70% 이상이 서비스산업에서 만들어지는 데 반해 서비스산업의 GDP 비중이 60%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서비스산업의 열악한 생산성을 의미한다. 서비스산업 근로자가 제조업 분야의 글로벌 기업 근로자보다 임금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1987년 민주화 이후 집권한 역대 어느 정부도 서비스산업을 미래로 여기고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제조업 수출전략으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국가들 가운데서 한국처럼 국가 경제정책이 여전히 제조업에만 집중돼있는 경우는 없다. 제조업이 아무리 커져도 GDP의 30%를 넘기는 선진국은 없었다. 일자리의 대부분은 서비스산업에서 나온다. 선진국으로 진입한 모든 국가는 서비스산업 강국이다.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이 올라가지 않고는 고임금과 높은 복지 수준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 한국이 제조업 강국이 된 비결은 글로벌 시장을 향한 경쟁을 거듭하면서 좁은 내수의 한계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왜 같은 일이 서비스산업에는 벌어지지 않는가. 서비스산업도 글로벌 전략으로 빅뱅을 시도할 수 있다. 시작은 정부의 의지와 전략이다.

일본 세계 10대 관광 대국으로 변신

관광 주변국에서 관광 대국으로 변신한 일본의 경우는 정부 주도 서비스산업 혁신의 현장을 보여준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을 찾는 외국 관광객 수는 한국보다 적었다. 2005~2011년까지 연간 600만~800만 수준에 머물던 일본의 외국 관광객 수는 2012년부터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렸다. 2014년 1300만명을 돌파해서 그해 한국의 1400만 외국인 관광객 수에 근접하더니, 2015년에는 1900만명을 넘겨서 1300만명 수준에 머문 한국을 추월했다. 2016년에 일본은 2400만명의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여 1700만명의 한국과의 격차를 벌렸다. 2018년에는 3000만명을 돌파했다.

교통시설 이용은 복잡하고, 영어는 잘 통하지 않고, 많은 상점에서 신용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세계 10대 관광 대국으로 부상한 비결은 무엇일까. 엔저로만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2012년 일본 정부의 담대한 구상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미 인구절벽, 지방 쇠락의 위기에 직면한 일본은 일본경제의 활로를 지방의 매력을 세계에 파는 것에서 찾기로 했다. 지방만의 매력을 발굴해내고 그것에 스토리를 입히고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 노력의 결실은 숫자가 증명하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글로벌 산업으로의 도약은 인구절벽으로 내몰리는 한국경제의 돌파구 찾기가 될 수도 있다. 수도권과 지방간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균형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세계적인 한류 열풍은 서비스산업 글로벌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아닌가. 갈라파고스로 조롱받던 일본도 했는데, 왜 한국은 못할까. 도전정신이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는가.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