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아트&디자인] ‘파이프 화가’ 이승조, 50년 지나도 새롭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68년은 그에게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제1회 ‘동아국제미술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이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았습니다. 국전에서 서양화 부문 최고상을 추상화 작품이 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죠. 이후 1971년까지 국전에서 4회 연달아 수상한 그는 “상을 타기도 어렵지만 안 타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한국 기하 추상의 선구자’라 불리는 고(故) 이승조(1941~90) 화백 이야기입니다.
이승조는 이른바 ‘파이프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둥글고 긴 파이프 형상, 엄격한 구도, 금속 질감이 두드러지는 색조. 참 독특해 보이는 이 그림에 그는 진심이었습니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아방가르드 그룹에서 활동하던 그가 파이프 형상 회화를 처음 선보인 것도 1968년입니다. 그는 왜 이토록 원통형 이미지에 매달렸을까요. 생전에 그는 “아폴로 우주선 발사로 새롭게 우주의 공간 의식에 눈뜨며 시작했다”고 말했는데요, 실제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시선을 우주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공간으로 끌어들입니다. 평면인 캔버스 안에 무한하게 확장되는 우주를 담고자 했던 야심 찬 실험과 시도였습니다.
지난 20~25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아트바젤 홍콩 2023’이 열렸습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이 행사에서 많은 한국 작가들의 그림이 판매됐는데, 이 중엔 이승조의 1987년 그림 ‘Nucleus(핵)’도 있었습니다. 한 해외 컬렉터가 한화 약 4억원(30만~35만 달러)에 구매했습니다. 어쩌면 이는 국제 미술시장에서 한 갤러리가 낸 작은 성과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올해가 작가 23주기 되는 해이고, 아직 이 작가가 국내외에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미술시장에서 작품 가격이 곧 그 가치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작가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가 인정받기 위해선 가격이 제대로 매겨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미술사 연구자들의 탐구와 통찰로 한 예술가의 작업이 잘 해석되고 평가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그림을 볼 때마다 늘 안쓰럽다. 그 안에 몹시 치열하게 자신과 싸움을 하다 떠난 집요한 작가가 보인다.” 지난해 가을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이승조 개인전’이 열렸을 때, 작가의 딸 이지은(40·미술아키비스트)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캔버스에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것도 보이고, 나중에 투병하며 힘 빠진 붓발도 다 보인다”던 그는 “이제라도 아버지의 작업이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는 이승조의 ‘파이프 그림’은 자신이 살던 시대, 현대 문명에 대한 그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출발한 ‘이승조 알리기’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됩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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