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와 중국 사이, 이 나라 골목에서 본 것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고락푸르(Gorakhpur)에서 로컬 버스를 타고 세 시간을 달리면 인도와 네팔의 국경인 소나울리(Sonauli)에 도착합니다. 소나울리 국경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로 국경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죠. 출입국 도장을 찍어주는 이미그레이션 창구는 애써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는 인도에서 국경을 넘어 네팔로, 그리고 다시 버스로 한참을 달려 카트만두로 향합니다. 버스에 탔을 때부터 생각보다 일정이 늦어져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쪽에서 무슨 사고가 났는지, 버스는 거의 두 시간을 교통 체증에 묶여 있더군요. 네팔에서는 그리 드물게 있는 일도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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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멜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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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상을 떠나서도, 인도와는 도시경관의 차이가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목조로 만들어진 사원과 그 주변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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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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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어느 국가가 패권을 쥐고, 때로 분열하는 이합집산의 역사가 오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권을 쥔 것이 구르카 왕조였죠. 구르카 왕조의 프리트비 나라얀은 영토를 확장하고 1768년 네팔 왕국을 세웠습니다. 네팔 통합의 출발이었고, 현대 네팔의 직접적인 탄생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네팔도 식민주의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인도를 노리고 있던 영국은 산악 지대에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영토 확장과 함께 양모 산지에 접근하고자 하는 경제적 동기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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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르바르 광장의 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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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도 섭정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민주세력이 성장했습니다. 섭정 아래에서 권력을 잃어버린 국왕 트리부반(Thribuvan)이 인도로 망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죠. 결국 1950년대 내각이 만들어지고, 곧 선거를 통한 의회까지 구성됩니다.
트리부반의 뒤를 이은 국왕 마헨드라(Mahendra)는 전제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정당활동의 불법화를 선언하기도 합니다. 의회도 내각도 국왕의 손으로 임명되었죠. 하지만 1972년 비렌드라(Birendra)가 즉위하며 다시 민주화가 추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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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르바르 광장 뒤편의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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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회장에서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한 것은 보수파였던 갸넨드라(Gyanendra)였습니다. 갸넨드라는 전제적인 왕정을 시도했고, 그럴수록 마오이스트와의 내전은 더욱 격해졌습니다. 네팔의 민주계열 정당이나 NGO 세력에 대한 탄압도 이어졌죠.
결국 2005년, 뉴델리에서 7개 정당과 마오이스트 세력이 왕정에 반대하는 연합전선 구성에 합의합니다. 무장투쟁 세력을 포함해, 네팔의 진보적 세력이 모두 연대해 왕정 폐지를 외친 것이죠. 반군의 세력이 강해지고, 내전으로 사망자와 난민이 대거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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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레주 바와니 사원 |
ⓒ Widerstand |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네팔은 네팔의 정체성을 가지고 국가를 유지했습니다. 유지만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더 나은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현대사의 격동도 그 노력이 있었기에 남은 흔적이었습니다.
카트만두에 머무는 동안, 저는 굳이 관광지를 찾아다니지 않고 천천히 골목과 골목 사이를 걸었습니다. 박물관이 된 왕궁과, 관광지가 모여 있는 더르바르 광장 정도만 들러 보았습니다. 더르바르 광장에서는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일본인 관광객들을 우연히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고, 골목에서는 마음에 드는 카페에 앉아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곳의 골목에는 어디든 안심이 되는 풍경들 뿐입니다. 언급했듯 제게 카트만두의 첫인상은 화려하고 잘 정비된 도시였습니다. 떠나는 날까지 그 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골목 곳곳의 간판들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떠나는 날,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을 지나쳤습니다. 그들이 만들게 될 이 도시의 새로운 풍경을 생각했습니다.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꿈 위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격동의 흔적을 여전히 생각했습니다. 그때가 된다면, 정말로 화려해진 이 도시에 언젠가 돌아와 눈에 익은 간판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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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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