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지척인 대학가인데 동네가 왜이래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 화전역 화전동 랜드마크 중 하나인 화전역 광장. 각종 규제로 역이 집중과 확산보다 분산과 정체를 매개하고 있어 안타깝다. |
ⓒ 이영천 |
시골 면사무소 소재지에나 어울릴 법한 공간 구성이다. 한때는 이곳 주간선도로였을 굽은 왕복 2차선 도로가 그대로다. 길에 면해 자리한 오래된 군부대 영향인지, 이름마저 화랑로다. 수색으로 연결된 중앙로가 마을을 둘로 갈라놓았다.
공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 하나는 억압적이다. 공간 대부분은 '군사시설보호구역'이다. 창릉신도시로 육군 30사단이 이전해도, 한국항공대 활주로와 주변 군부대로 해제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항공대 활주로는 건축물고도까지 제한하고 있다.
▲ 중앙로 화전동을 둘로 가른 중앙로. 멀리 보이는 곳이 수색 방향이다. |
ⓒ 이영천 |
이로 인해 대학을 품고 있는 공간답지 않다. 6천여 항공대 학생들 발길이 어디로 향할까. 화전역에서 전철 타고 홍대나 신촌으로 향한다. 1954년 생긴 화전역과 주변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역이 집중과 확산보다는 분산과 정체를 매개하는 결절점으로 전락했다. 인문지리적으로 보아 결절 부위가 분명해 보이는 이곳이, 머물기보다 지나쳐 가기 바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륙침략 전초기지
▲ 덕은동 쌍굴터널 수색조차장을 만들면서 일본 육군 보급창고로 통하는 철길을 내면서 만든 쌍굴 중 하나. 지금은 도로로 사용중이다. |
ⓒ 이영천 |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침략하면서, 철저히 경의선을 활용한다. 이 전쟁은 화전동을 크게 변화시킨 기제였다. 수색과 화전을 전쟁 배후기지로 구상하는데, 이는 철도와 연계된 대규모 군사기지와 보급 창고 구축이었다.
서울 용산과 유사한 형태를 계획하고 공사에 들어간다. 80여 년이 흐른 지금, 경의선 변에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해 설치했던 각종 시설물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용산이 조선 침략과 지배의 무력 기반이었다면, 수색과 화전은 대륙침략의 거점이었다.
▲ 화전동 벽화 도시재생 사업으로 시행한 여럿 중 벽화마을 가꾸기 사업의 흔적이 남은 골목. |
ⓒ 이영천 |
창릉신도시에 편입된 30사단 자리가 일본군 대규모 주둔지였다. 아울러 항공대 활주로 끝단엔 일본 육군 보급 창고가 있었다. 일제는 주둔지 병력은 물론 보급 창고에서 피복, 탄약, 식량 등을 포함한 각종 보급품과 당인리 발전소에서 실어 온 무연탄을 수색 조차장에 모아, 경의선을 통해 만주로 향하는 침략 루트 기점으로 삼았다. 이 모든 행위를 수색과 화전에서 통합 관리하고자 했다. 꽃밭이 지천이던 화전동은 이렇듯 일제의 야욕으로 대규모 침략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린벨트
▲ 역 주변 가로 2차선 화랑로가 연출하는 가로 풍경은 7~80년대 드라마나 영화 세트장으로 활용한다 해도 어색해 보이지 않을 정도다. |
ⓒ 이영천 |
그린벨트 안에선 주택지나 산업단지, 그 밖에 구역 지정 목적에 위배 되는 어떤 도시계획 행위도 할 수 없다. 개개인은 건축물 용도변경과 토지 형질변경이 불가능했으며, 증축이나 개축에도 엄격한 제약이 가해졌다. 사유 재산에 50년 이상 규제를 가해온 셈이다.
지정 당시의 경제·사회 환경에는 부합했다. 일시적이나마 그때는 옳았지만, 그 후부터는 잘못된 정책이었다. 도시확산을 막아내지도, 주택과 교통 등 도시문제를 해결하지도, 그렇다고 자연환경을 지켜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 학교 덕양중과 덕은초가 같은 곳에서 출입구를 공유하는 화전동 언덕. |
ⓒ 이영천 |
같은 구역 내에서의 형평성마저 무너진 건 이미 오래다. 90년대 말에서야 '선계획 후개발'이라는 완화정책을 펼쳤으나,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회복이나 활성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군사시설보호구역
▲ 한국항공대학교 1963년 이전해 온 한국항공대학교. 사진 맞은 편이 활주로로 군사시설 등으로 보호되고 있다. |
ⓒ 이영천 |
망월산자락에 기대앉은 화전동은 창릉천이 펼쳐 놓은 넓은 개활지에 평야도 기름지다. 개활지에 몇 구릉성 산뿐인 이곳에 1963년 11월 항공대가 이전해 온다. 활주로 입지에 유리한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활주로는 항공기 이착륙을 고려한 진입표면과 제한(수평)표면에 따라 주변 건축물고도를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활주로 가까운 곳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 육군 30사단 정문 창릉신도시 개발로 이전했는지, 30사단 본부 정문이 굳게 닫혀있다. |
ⓒ 이영천 |
이런 영향으로 화전동 많은 땅이 1973년부터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서는 시설보호와 군사작전 등의 사유로 '개인의 토지 이용 및 사유재산권 행사를 통제하거나 제한'된다.
수도권정비계획과 신도시
1984년 수립된 수도권정비계획은 획일화된 사고가 탄생시킨 제도였다. 서울과 경기도를 5개 권역으로 나눈 계획은, 지도에 선을 그어 천편일률적으로 권역을 나눔으로써 수많은 불합리를 파생시킨다.
▲ 화전동 골목 수십 년, 각종 규제로 큰 변화 없이 지켜 온 골목 풍경이 오히려 정겹다. |
ⓒ 이영천 |
이렇듯 강력한 규제로 묶어 놓고 5년 뒤 군사시설보호구역과 그린벨트가 아닌 곳에 인구 30만을 수용할 '일산신도시' 계획을 발표한다. 마치 주머니에 넣어둔 사탕을 아무 때나 꺼내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함에도 서울에 면한 곳은 철저히 소외된다. 그린벨트에 이전촉진권역이 압박을 가하고, 군사시설보호구역에 면한 곳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비 새는 지붕이나 수리하면 그만이다. 화전이 이런 3중고를 겪은 대표적인 곳 중 하나다.
▲ 창릉신도시 에정지 망월산 자락 화전동 높은 골목에서 바라 본 창릉신도시 예정지. |
ⓒ 이영천 |
80여 년 지켜온 마을과 생활권이나마 지켜낼 수 있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건설될 신도시는 규격화한 블록에 아파트 일색일 게 뻔하다. 화전동 기존 생활권은 신도시에 철저히 종속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공간이 온전히 지켜질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급격한 변화를 맞을 것이다. 크고 작은 갈등과 반목도 생길 것이다. 예상은 되지만, 창릉신도시가 80여 년 인고의 시간을 버텨온 공간에 어떻게 화답할지 무척 궁금해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야근, 병원, 기절... 윤석열 대통령이 봐야 할 '주 69시간' 영상
- 정부의 건설노조 탄압으로 실업자가 됐습니다
- '다큐 황은정' 아직 못 봤니? "다큐가 아니라 예술이야"
- 또다른 강제동원 피해원고 4명 법원에 "전범기업 자산 강제매각 해달라"
- "썩은 양파 버리려다 일 벌였습니다... 함께할 사람 찾습니다"
- 나리나리 개나리 열매는 방광염에 좋아요
- 이재명 "윤 정부 굴종외교 바로잡는 것이 안중근 의사 기리는 길"
- "이재명 사법 리스크, 민주당 위기의 본질 아냐"
- 정순신 낙마 한 달만에... '드루킹 수사' 지휘 우종수 내정
- 탕후루를 만들며, 남편의 '국밥'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