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이런 곳이 있다고? 경외감마저 든다
[이완우 기자]
▲ 용유담 거북바위 |
ⓒ 이완우 |
지리산 역사 문화 설화의 원천인 용유담
남원시 산내면에서 함양군 휴천면까지 흐르는 하천의 물줄기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 노고단까지 주능선의 산줄기와 거의 평행으로 대응된다. 화산암 산체(山體)인 백두산과 한라산에 천지와 백록담이 있다면 선캄브리아기의 오래된 변성암 산체인 지리산은 엄천강의 용유담이 있어 지리산의 지질(地質)과 산하(山河)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 용유담 돌개구멍 |
ⓒ 이완우 |
용유담 주위에는 엄천사, 마적사, 법화사 등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았다. 신라의 헌강왕(861-886)은 지리산 남쪽 화엄사의 결언선사(決言禪師)에게 지리산 북쪽 계곡 용유담 가까이에 선친인 경문왕(841-875)의 원찰(願刹)로서 엄천사를 창건(883년)하게 하였다. 경문왕은 당나귀 귀 설화로 잘 알려진 왕이다.
지리산 천령군 엄천사의 낙성식 법회에 헌강왕이 행행(行幸)하였고 최치원(857-900)이 이 사찰의 발원문을 지었다. 최치원은 이 지역 천령군(현 함양군)의 태수로 몇 년 뒤에 부임한다. 엄천사는 화엄사, 해인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요 사찰이었으나 오래전에 없어지고 사찰의 터만 남아 있다.
▲ 용유담 풍화 마모 |
ⓒ 이완우 |
하루는 선사가 바둑을 두는데 용 여덟 마리가 싸웠다. 시끄러워서 나귀가 돌아와서 강을 건너려는데 알지 못했다. 나귀는 힘이 다해 그대로 지쳐 쓰러졌다. 선사는 조용했던 눈먼 용 한 마리만 남겨 놓고 시끄럽던 여덟 마리 용을 쫓아버렸다. 나귀는 계곡의 바위가 되었고, 선사가 화를 내며 던져버린 바둑판의 조각들이 계곡에 바위로 널려있다. 용으로 상징되는 성모산신 신앙과 마적선사의 불교가 용유담에 공존하면서 이런 전설을 남긴 것이 아닐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함양군 용유담 계곡에 가사어(袈裟魚)가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물고기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 달공사(達空寺) 돝못(猪淵)에 살다가 늦가을에 용유담으로 내려와서 겨울을 나고 이른 봄에 올라갔다고 한다. 승려가 가사를 걸친 것 같은 무늬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연어과의 열목어로 추정되며 지리산의 빙하시대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의미 깊은 기록이다.
용유담에 가사어 설화가 전해오는데 인상적이다. 옛날에 지리산 반야봉 아래 계곡에서 어느 소금 장수가 소금 짐을 쉬면서 모닥불을 피우며 돌멩이를 굽고 있었다. 한 스님이 지나가다가 궁금해서 물었다. 돌이 달구어져 말랑말랑해지면 연못에 던집니다. 그러면 연꽃이 피어나는데 그 연꽃에 올라타면 극락세계로 간답니다.
▲ 용유담 두꺼비바위 |
ⓒ 이완우 |
스님은 불을 더 피워 보아도 돌은 여전히 달구어지지 않았다. 애가 탄 스님은 굽던 돌을 연못에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스님의 넋은 가사어로 환생하여 구운 돌이 연꽃으로 피어난 연못의 여울에서 헤엄쳤다. 욕심과 의심보다 순박한 믿음과 진심이 깨달음에 가깝다는 이 전설은 지리산의 문화적 정체성을 암시하는 소중한 설화이다.
생명과 평화 지리산둘레길과 용유담 계곡
용유담은 2000년대 초반에 지리산댐 계획 추진에 대한 반대 운동의 중심이었다. 휴천면 문정마을 앞을 지나는 엄천강 지역이 1987년 수자원개발계획으로 지리산댐(문정댐) 예정지로 지정되었다. 이후 다목적댐, 홍수 조절용 댐 또는 식수원 댐으로 명목을 바꾸어가며 계획이 추진되었고 그때마다 찬반 논란이 계속되었다.
▲ 용유담 기암괴석 |
ⓒ 이완우 |
지리산댐 반대 국민행동이 결성되고 2004년 3월에 생명 평화 탁발순례를 지리산 노고단에서 출발하였다. 지리산둘레길이 제안되었고 2008년 4월에 남원시 산내면에서 함양군 휴천면 세동마을까지 용유담을 중심으로 하는 20km의 시범구간이 열렸다. 2012년 5월에 전 구간 274㎞를 개통하여 성찰과 순례의 길로 자리 잡았다. 지리산둘레길은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목표로 자연 속을 걷는 휴식처 역할을 하며 역사와 문화를 품은 길이 되었다.
문화재청은 용유담의 명승 지정을 예고(2011.12)하였다가, 수자원공사와 지자체 등의 명승 지정 반대 의견을 이유로 명승 지정의 심의를 보류(2012.06)하였다. 이후 환경부에서 지리산댐 건설 계획의 사실상 백지화를 표명(2018.6)하였지만, 명승의 가치를 충분히 지닌 용유담은 현재까지 명승 지정 없이 효과적인 보존 대책 없는 유원지에 머물러 있다.
지리산과 용유담의 지질과 자연 문화유산 가치
▲ 용유담 지질자원 |
ⓒ 이완우 |
18억 년 전 지구는 박테리아와 남조류 등 원핵생물의 세상이고 본격적인 진핵생물은 출현하지 않은 까마득한 지질시대이다. 지리산은 오랜 지질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지구 지각의 내부를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할 수 있어 지질 자원으로 가치가 크다.
지리산 주능선 곳곳에는 기반암이 노출되어 빙하 환경에서 침식 발달한 주빙하지형과 퇴적물을 관찰할 수 있다. 1억 8천만 년 전에는 대보화강암류의 관입으로 화성활동이 있었으며 이때 지리산 기반암은 지하 10여 km 깊이에 위치했다고 하니 지리산 지질 구조는 역동적이었다.
용유담 지역은 18억 년 전에 형성된 지리산 기반암의 변성암들인 흑운모 편마암, 화강암질 편마암 등이 험준한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기반암이 하천의 지표로 노출되어 있어 가치 있는 지질 자원이다. 이들 암석이 거쳤을 지질 시대의 오랜 여정을 상상하면 경외감마저 든다.
용유담 계곡의 하상은 지리산 기반암처럼 구조선과 절리가 북동-남서 방향으로 주로 형성되었으며 여울, 웅덩이, 돌개구멍 등이 널리 나타나 있으며 절리의 영향으로 형성된 기반암이 층계를 형성하며 와류를 일으키는 곳도 있다. 30여 개의 돌개구멍은 크기 22cm×20cm의 소형부터 282cm×193cm의 대형까지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다.
▲ 용유담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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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천왕봉, 반야봉과 노고단에서 계곡으로 흐르며 모인 강물이 많은 설화와 전설을 품고 용유담에 이르러 엄천강으로 흐른다. 구운 돌이 연꽃으로 피어나는 연못과 가사어, 마적선사의 전설은 지리산의 정체성을 피워낼 인문학적 자산으로 여겨진다. 지리산 천왕봉 가는 절경의 길목인 엄천강 용유담에 야생화와 새싹이 움트는 봄의 생명력이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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