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이인규, ‘협박 수사’가 자랑인가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SK처럼 그동안 수집된 자료를 근거로 편법 증여 등 승계 과정에서 있었던 부당 내부거래에 대해 수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물론 오너 가족도 크게 다칠 것이니 의뢰인들을 잘 설득해 주십시오.”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검사장)이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에 적은 자신의 발언이다.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때 3개 대기업 측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여야 후보 측에 정치자금을 건넸음을 실토하라고 압박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회사와 대주주를 겨냥한 ‘표적 수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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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토하면 딴 건 봐준다’ 거래 공개
타파할 악습을 되레 당당하게 여겨
더는 이러한 검사가 나오지 않기를
」
이 전 검사장은 삼성 고위 임원을 불러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LG 측 변호사에게는 이렇게 경고했다고 했다. “LG카드 사태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되면 상당히 타격이 심할 거야.” 해당 변호사의 대꾸가 “왜 겁을 주십니까?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죠”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요구에 응하지 않아 LG홈쇼핑을 압수수색하기로 했다고 그는 책에 적었다. 변호사가 찾아왔을 때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도 좋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중략) 일단 수사에 착수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고 썼다. 대선자금과 관련해 원하는 진술을 하지 않는 기업 임원에게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협조하지 않으니 약속대로 당신이 들어가면 되겠네요”라고 말하면서 후배 검사에게 구속영장 청구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구속에 직면한 그 임원에게 “그럼 고생하시라”고 인사했다는 대목까지 있다.
이 전 검사장은 대선자금 수사는 SK 비자금 사건에서 우연히 실마리가 포착됐는데, 다른 기업 쪽은 단서나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자진해 고백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압박해 진술을 얻었고, 그것이 수사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당당하게 설명했다. 그의 ‘정신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검사 역할을 맡은 곽도원이 최민식에게 “난 니가 깡패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어. 넌 내가 그냥 깡패라고 하면 그냥 깡패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가 원하는 걸 내놓지 않으면 회사와 집안이 풍비박산 날 거야.’ 이런 식의 수사 때문에 검찰이 욕을 먹었고,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돼 왔다. 과거엔 흔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검사들에게 결코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닐 것이다. 바라는 것을 주면 다른 죄는 덮기로 약속했다는 이 전 검사장은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책을 읽은 한 현직 검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책 후반부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한 이 전 검사장의 기억으로 채워졌다. 이런 내용이 있다. “과장은 지시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16장짜리 보고서를 올렸다. 박연차 회장을 압박할 새로운 범죄 혐의사실이 총망라되어 있었으며 향후 수사 계획까지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박 회장을 항복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변호사에게) 수사 진행 중인 박 회장의 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중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기다리면 연락이 올 것이다(고 생각했다).” 압박과 거래, 같은 방법이었다.
이 전 검사장은 자신이 노 전 대통령과 검찰청에서 나눈 말, 노 전 대통령과 박연차 전 회장이 조사실에서 나눈 대화를 공개했다. 직무상 얻은 정보를 일방적으로 유포했다.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회장은 반박조차 할 수 없다.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는 법조계 금언의 소중함을 실감한다. 이 전 검사장은 자신이 자랑스러운 검사였다고 믿는 모양인데, 대한민국에 더는 이런 검사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글=이상언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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