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미지의 꿈

전병선 2023. 3. 2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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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비는 우리가 K 씨의 집에 도착한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한사코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는 그의 간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K 씨는 지난날의 많은 사연을 우리 부부에게 쏟아놓고 싶었는가 보다. 60년대 K씨 부부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캐나다에 이민을 떠난 것이다.

당시 자신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해서 친구의 제안대로 송금한 후, 대망의 꿈을 안고 부푼 가슴으로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서 기다리겠다던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노선의 탑승객들까지 모두 공항을 빠져나간 후까지도 그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던 그 친구의 집을 어렵게 찾았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그 집 앞에는 “House Sold” 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에 떨리는 다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주인이 없는 빈집 주차장에 자리를 펴고 아내와 어린 남매를 두고 거리를 헤맸다. 혹시라도 그 친구를 붙잡으려는 일념으로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아빠! 배고파요” 하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아빠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달라고 아내와 어린 자식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는 것이다. 잔인한 친구의 치밀한 사기행각은 다복한 친구의 가정을 파멸의 길로 내몰았다. 그 친구는 이민 정착 중에도 자주 한국을 드나들었고 가족처럼 정을 나누던 사이였기에 꿈에도 의심해본 일이 없었다는 것이 더욱 원통하다고 말했다.

K씨는 서울에서도 소문난 사진작가다. 더 넓은 세상에서 사진예술가로 성공하려는 꿈을 안고 이민의 길을 택한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손때 묻은 사진기들을 매만지며 바닥이 흥건하도록 흘러내린 눈물로 사진기를 닦다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니 미칠 것만 같았다. 떨리는 무릎을 치켜세우고 아이들과 아내를 붙들고 온 동네가 울리도록 통곡을 했다. 길가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서툰 영어라도 하소연이라도 해보겠지만 낮에는 서성거리는 사람조차 눈에 띄지 않는 심란할 만큼 한가로운 동네였다.

조국 대한민국을 등지고 나온 천벌일까. 처량하리만큼 파~란 하늘조차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친구의 꼬드김에 들떠서 고분고분 그가 하라는 대로 전 재산을 다 처분한 것이다. 달러를 바꿔 그의 지시대로 불법 송금을 자행했으니 경찰에 신고조차 할 수 없는 범법자가 된 것이다. 식음을 전폐하고 길을 헤매다가도 밀려오는 분노를 저만치 밀어두고 어깨에 메고 나온 카메라를 들고 틈만 나면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을 카메라에 담았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죄를 씻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아무 죄 없는 어린 것들이 어리석은 아빠 때문에 자칫 고아가 될 수도 있으니 “모든 잘못은 나의 무식함과 무모함의 결과물이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처량한 달밤에 아이들이 아빠 우리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고 졸라 댈 때는 잠시 위험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달러를 가지고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며 할 수만 있으면 집 두 채를 다 정리하라고 하던 그 친구를 찾기 위해서 그는 결심하게 된다. 우선 생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일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날부터 밴쿠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사진관을 찾아다녔다. 스튜디오의 쇼 윈도를 바라보며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날마다 영어 단어장을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며 한 손으로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면서 하루하루를 헤매고 다녔다. 아내가 남의 집 청소부로 일하며 몇 달러씩 벌어온 것으로 아이들 샌드위치를 먹이며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일터를 찾아야하기에 가장 번화가인 다운타운에 있는 유명하다는 스튜디오 쇼 윈도 앞에서 실내를 들여다보며 그곳의 매니저를 찾아 일터를 구하러 왔다고 애원을 한 것이다.

어느 날 관광객을 맡아 사진을 찍게 되었으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근 시간 두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하고 일거리를 얻은 것이 너무 기뻐 밤중에도 아내 몰래 밖에 나가 잔디 위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가장 번화가에 두 곳이나 스튜디오를 경영하는 주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의 별을 따온 것처럼 황홀한 밤을 보냈다.

그 주인은 얼마 되지도 않아 K씨의 재능에 놀라움을 넘어 감격하며 풀타임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가 취업하여 두 달이 되기도 전에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매출이 몇 곱절을 넘어서니 주인은 그가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 또 그의 성실한 자세를 지켜보더니 이곳에서 꿈을 이루고 자신이 곧 정년을 맞을 것이니 그때 이 매장의 주인이 되라 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그 일터를 사랑하고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부부를 수차례 만났다. 그의 프로정신은 물론이거니와 만면에 미소와 친절함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자아내기 충분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부부는 자신들에게 절망을 안겨준 그 친구를 증오하는 데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그들을 향한 원망과 복수심을 버리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큰 아픔을 딛고 모든 시름을 잊어버릴 만큼 대성을 했으며 이민사회의 선망의 대상으로 우뚝 섰다.

그들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답게 겸손하고 친절한 부부였다. 일거리가 밀려 바쁜 중에도 새로 입국한 이민자들이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일일이 돕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민 희망자들에게 여러 통로를 통해 자신의 비통했던 지난 일들을 부끄럼 없이 알림으로 다시는 자신 같은 불행한 일이 거듭되지 않길 바란다는 간증을 하곤 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그들은 자신을 인정하고 한 평생을 키워온 기업을 동양인인 자신을 믿어 몽땅 인계해주는 천사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 우리 삶의 모든 여정에서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건 사람밖에 없다.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간다지만 꽃은 시들고 마르고 형체가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고 자자손손 계속 이어간다. 그러므로 사람의 향기는 천국까지 이어가는 영원한 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분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정성스레 대접했다.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줘서 고마웠다.

요즘에도 이민을 떠나는 가정들이 많다. 무엇보다 낯선 땅에서 좋은 이웃을 만나는 일이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이민을 결정하고 오랜 세월 몸담았던 직장을 접고 친구들과 친지들의 송별을 받으며 정든 고국을 떠난다. 여자들은 이민 길에 화려한 상상을 안고 드레스 한두 벌은 해간다. 파란 잔디 위를 드레스 차림으로 걸어 세단에 오르는 꿈도 함께 싣고 떠날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때론 너무 멀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이민국 공항에 도착하면 ‘누가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그 가족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요즘 같은 빠른 정보세상에서는 드문 일이겠지만 사기꾼들의 친절에는 저의가 있다. 온갖 호의를 베풀며 집요하게 꼬드겨 이민정착금까지 모두 앗아간다. 에덴동산에서부터 부패한 양심, 그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는 곳곳에 덫을 놓아 선한 사람들을 어두운 소굴로 몰아간다.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은 더 위험 할 수 있었다. 보이스피싱이 악의 그물이다. 동족끼리 서로 돕는 미풍양속은 옛말이 되었을까. 친인척과 친구, 심지어는 피를 나눈 형제 사이까지 파고드는 악의 세력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닌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민사를 통해 이민의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길이 아니다. 먼저 경험한 이민사의 선구자들이 아름다운 안내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나라에 정착하든지 따뜻한 민족애로 정직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민족이 되길 희망한다. 이 땅에서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고 머무는 곳마다 천국을 이루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민족으로 남길 소망하자. 훗날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금낭화>

흔들리지 않는 꽃이 있을까
하릴없이 떠는 몸짓이 있겠는가
자유, 평화, 사랑의 기치를 흔드는
꽃으로 피어 꽃으로 말하는 꽃
굽힐 줄 아는 금낭화,
바람에 화답하며
햇빛을 흠모하고
노을을 연모하는 꽃
밤이면 별빛 받아
차곡차곡 사랑을 쟁이고
달 떠오르면 달 앞에
수줍게 서는 꽃,
비록 흔들릴지라도
황금빛 가루 품고 있는
꽃 중의 꽃 금낭화
자유, 평화, 사랑의 금낭화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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