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훌륭한 지리학자, 김정호는 아니다

오문수 2023. 3. 2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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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지리서 <산경표> 편찬한 순창 신경준 선생과 생활력 강한 여인들

[오문수 기자]

 신말주 선생의 호를 따라 지은 '귀래정' 모습
ⓒ 오문수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에서 흘러나온 물을 따라 하류로 걸으면서 느끼는 게 있었다. 강물은 산을 따라 흐르고 두 개의 산자락 사이로 흐르는 계곡에서는 병목현상으로 인해 생긴 급류 때문에 기암괴석이 탄생한다. 임실과 순창의 경계에 있는 장군목이 그렇고 곡성 청계동 계곡이 그랬으며 곡성 평야를 흐르던 물이 좁은 계곡 사이로 흐르는 침곡 또한 마찬가지다.
아하! 산과 물이 만나 우리 산하를 이루는 자연경관을 이루는 이치가 그렇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섬진강변을 걸었다. '그렇다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보며 산천 유람했던 선각자 중에도 이런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순창에서 훌륭한 지리학자를 만났다. 
          
 순창 장군목 모습으로 양쪽의 큰 산 사이로 흐르는 섬진강이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곳이다. 급물살로 인해 기묘한 바위와 집채만한 바위들이 있었다. 신비한 바위로 유명세를 탄 요강바위가 바로 이곳에 있다.
ⓒ 오문수
   
<산경표>를 편찬한 신경준 선생이 바로 그다. 조선 영조(1769) 때에 편찬된 <산경표>는우리나라 지리를 사실에 근거하여 15개 산줄기(백두대간, 1정간, 13정맥)로 나누고 1650여개 지명과 1500여개의 산과 고개 등을 일목요연하게 표기하였다. 또한 10대 강줄기를 유역별로 나누어 자세하게 수록해 놓은 우리 민족의 전통지리서이자 산의 족보이다. 이 산줄기 체계는 1900년대 초까지는 국가 공인 개념으로 사용되었었다.
  
신경준의 출생지인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는 '귀래정' 신말주 선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남산대' 마을이 있다. '귀래정'에는 조선시대의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지도제작자였던 신경준 선생의 유고집과 고택이 있다. <산경표>는 순창 출신인 신경준(1712~1781)에 의해 <여지고>와 <산수고>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다.
  
 신경준 초상화 모습
ⓒ 오문수
   
 우리나라를 호랑이에 비유해 그린 조선중엽 강태희의 <근역강산맹호지상도>로 척추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이 잘 그려져 있다.
ⓒ 오문수
 
신경준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로 <훈민정음 운해>를 집필한 국어학자이며, <동국문헌비고>와 <산경표>를 집필한 지리학자이다. <산경표>의 원리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절대 산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숙주 집안의 5형제 중 막내였던 신말주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27세에 낙향하여 그 후손이 대대로 거처한 곳이다. 나중에 형님의 권유로 사간원 우헌납 등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다시 낙향했다. 신경준은 신말주의 후손이다.

생활력 강한 순창 여인들
 

신말주 선생의 후손이자 순창군문화관광해설사인 신렬호씨의 안내를 받아 돌아본 고택에는 신말주 선생의 부인 설씨 부인이 지은 <권선문>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보물 제728호인 <권선문>은 본래 불교에서 신자들에게 보시를 청하는 글이다.
   
 신숙주 집안의 5형제 중 막내인 신말주 선생의 호를 따라 지은 '귀래정' 앞에 씌어진 설씨부인과 신말주의 작품에 대한 기록이 있는 안내문
ⓒ 오문수
   
 신말주 선생의 부인 설씨부인이 살았다는 집으로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내외벽'이 인상깊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외부인이 안주인을 찾아오면 '내외벽'에 서서 안주인이 정장을 차려입을 때까지 기다리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 오문수
   
설씨 부인은 성종 13년 봄에 신비로운 꿈을 꾸고 난 후 지역에 있던 강천사를 다시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 후 시주를 권장하는 <권선문>을 직접 지었고 사찰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신도들에게 돌려보도록 했다.

원래는 한 폭의 두루마리였는데 후손이 오래 보관하기 위해 1첩 16폭의 병풍형식으로 만들었다. 이 <권선문>은 조선시대 여성 문인이 쓴 최초의 산문 형식의 글로 신사임당의 글보다 70여년 앞섰다.

'귀래정'을 안내하는 간판 맨 왼쪽에는 '순창 여인들의 길'이라는 안내 간판이 있다. 순창 여인들의 족적을 따라가는 순서는 인정샘→산동리 남근석→창덕리 남근석 →대모암→홀어머니 산성→귀래정→설씨부인 권선문→물통골 약수터→고려직제학 열부이씨려→요강바위 순이다. 옆에서 필자를 안내하던 신렬호씨가 "순창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한 반면에 남자들은 예로부터 한량이 많았다고 합니다"라며 웃는다.
   
  귀래정 앞 안내판에 씌어진 '순창여인들의 길' 안내문 모습
ⓒ 오문수
 
 산동리 남근석 모습
ⓒ 오문수
 
전라북도 민속자료 14호인 산동리 남근석을 보러 갔다. 남근석은 남성 생식기 모양의 돌로 민족 고유 신앙인 남근 숭배의 신앙물이다. 자손이 귀하거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성들이 남근석에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빌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매우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남근석은 아랫부분에 연꽃무늬를 새긴 점이 특이하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아기를 갖기 원하는 많은 여인들이 이곳에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순창 대모산성에는 강직한 여인에 관한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된 대모산성을 순창에서는 일명 '홀어미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홀어미산성에 대한 설화내용이다.
 
"순창에서 젊은 과부가 된 양씨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옆집에 설씨 총각이 살고 있었다. 설씨 총각은 양씨 부인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양씨 부인은 거절하였다. 설씨 총각의 끈질긴 구혼에 못 이긴 양씨 부인은 내기를 하기로 하였다. 양씨 부인이 성을 쌓고 설씨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다녀오는 내기를 걸었다. 설씨 총각이 한양에 다녀오는 동안에 양씨 부인이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기로 했다. 그런데 양씨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올려놓기 전에 설씨 총각이 먼저 도착하였다. 양씨 부인은 약속대로 혼인을 허락해야 하는데 평생을 과부로 수절하면서 살아온 터라 결혼을 허락하는 것은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다. 양씨 부인은 수절을 버릴 수 없어 치마를 뒤집어 쓴 채 대모산성 아래 경천에 빠져 죽었다"
 
순창하면 첫 번째 떠오르는 건 고추장이다. 순창전통고추장 민속마을은 순창군이 전통장류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순창고추장의 명성과 전통적 제조비법을 이어가기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3년여의 조성기간을 거쳐 1997년에 완성한 이곳은 순창군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고추장 제조 장인들을 아미산 자락에 있는 순창읍 백산리 일대에 모아 전통고추장민속마을을 형성해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순창고추장민속마을에서 4대째 고추장을 담고 있는 박현순 명인의 집에 들러 순창고추장이 유명한 이유를 들어보았다.

"순창은 지리적으로 천혜의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바람, 습도, 햇빛, 물, 안개가 있는 곳입니다. 연간 70일 정도 안개가 끼어 습도를 조절해주고 바람은 말려주는 역할을 하죠. 순창은 고추장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고추, 찹쌀, 콩,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순창 여인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손맛 또한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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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곡성투데이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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