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파산 앞둔 SVB를 사업모델로 소개한 당국

고세욱 2023. 3. 24.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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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욱 논설위원


이달 들어 10여일 새 미국 은행 규모 16위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도산했고 유럽 유수의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UBS에 인수됐다. 뉴욕 상업은행 시그니처 뱅크 폐쇄, 퍼스트리퍼블릭은행(FRB)의 유동성 위기도 있었다. 초대형 금융기관이 문 닫지 않았다는 점에서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덜 하다곤 하지만 속내를 보면 이번 ‘은행위기(banking crisis)’의 진행 과정은 공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금융위기 당시와 같은 무질서와 탐욕이 언뜻 눈에 띄지 않았음에도 위기가 발생했다. 금융위기를 겪은 글로벌 금융권은 제도를 보완하고 안전자산 확보를 서둘렀다. 초우량자산인 세계 최강국 미국의 국채가 1순위였다. 다음이 금융당국 및 공공기관이 보증하는 증권들이다. 문제가 된 SVB와 기타 은행들은 이런 상품 위주로 투자했음에도 문을 닫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코로나19로 풀린 돈은 증시를 띄웠고 빅테크 및 벤처기업들에 투자가 쏟아졌다. SVB 같은 은행들은 이들 회사에서 예치한 자금으로 금융위기 원인인 주택담보대출보다 안전한 미 국채 등에 투자했다. SVB의 경우 투자 자산 비중이 55%를 상회했다. 여기에 벼락부자와 신흥 벤처기업인들이 몰리면서 지급보증 한도인 계좌당 최대 25만 달러를 넘는 이른바 ‘무보험 예금’이 급증했다.

유동성 파티가 지속됐으면 문제는 없었겠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지난해 기준금리를 급격히 끌어올리면서 채권 가격이 뚝뚝 떨어졌고 국채 보유 은행들의 손실이 누적됐다. 고금리로 자금 융통이 어려워진 벤처기업 등이 은행에 맡긴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상환을 위해 은행들이 자산을 서둘러 팔자 더 큰 손실이 왔다. 재무 상황이 알려지면서 큰손들 위주로 뱅크런이 일어났다. 2010년대 이후 고위험자산을 공격적으로 늘렸던 CS도 긴축 정책에 타격을 입으며 위기가 파고들 ‘약한 고리’로 전락했다. 긴축 강화 대응에 소홀한 점, 안전에 대한 과신과 자만의 대가였다.

미 재무부, 연준, 스위스 중앙은행이 즉각 나서 큰불은 잡았지만 안심은 이르다. 외신에 따르면 SVB류의 안전자산 투자, 무보험 예금 위험에 노출된 미국내 중소형 은행이 약 200곳이다. 대형은행들이 백기사로 나섰음에도 최근 10일간 FRB에서 인출된 금액이 100조원 가까이 된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22일(현지시간) SVB에 취한 ‘모든 예금 보장’ 조치는 더 이상 없다고 말했다. 시장이 다시 동요하고 있다. 잔불이 언제 대형 산불로 번질지 모른다.

초긴장 상태인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 금융 상황은 차분한 편이다. “한국 시중은행들은 투자가 아닌 예금과 대출금리 장사 위주로 영업해 괜찮다”는 게 당국의 입장이다. 그렇게 욕먹던 ‘이자놀이’ 관행이 오히려 득이 됐다는 해석. 믿어도 될까.

투자 위험도는 적더라도 부채 위험도는 우리가 더 심각하다. 금융의 약한 고리인 비은행권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잔액은 지난해 3분기 약 86조원으로 7년 새 4배 이상 급증했다. 지난해 4분기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신용(가계+기업 부채) 비율은 225.1%로 역대 최고다. 실물이라도 낫다면 좋으련만 경상수지와 무역수지의 적자는 악화일로다. 잔불을 키울 마른 장작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미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저서 ‘이번엔 다르다’에서 “심각한 금융위기는 단독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했다. 그는 “생산성 감소와 저성장이 은행 대출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져 대출을 받지 못하고 이게 다시 생산량 감소를 유발하는 빈곤의 악순환이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당국의 대응이 중요한 때다. 사태 후 은행권에 경기대응완충자본을 부과하고 예금보호한도도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올리는 걸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보자. 윤석열 대통령의 ‘국내 은행업은 과점 시장’이란 발언 한마디에 부랴부랴 태스크포스(TF)를 만든 게 지난달이다. TF는 지난 2일 은행업계의 바람직한 사업모델 사례로 SVB를 꼽았다. SVB는 지난해 말부터 위기 징후가 보였는데 ‘우리 금융의 미래’처럼 소개했다. 회의 일주일 후 SVB는 문을 닫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지금 뻘쭘해할까,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까. 위기에 대한 통찰력·분석력 없이 관치와 대통령 입에만 기민한 당국이 걱정스럽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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