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문화재전쟁] 아무르강 하류 영령사 절터, 중·러 “원래 우리 땅”

입력 2023. 3. 24. 00:55 수정 2023. 3. 24.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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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앞바다 둘러싼 갈등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러시아와 중국 사이를 흐르는 아무르강(흑룡강)은 세계에서 8번째로 큰 강이다. 양국 국경을 따라서 사할린 앞쪽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유장한 물길이다. 아무르강 하류의 인적 드문 사할린 앞바다 근처의 절벽 위에는 놀랍게도 명나라 때 세운 영령사(永寧寺) 절터가 있다. 동해에 진출하려는 명나라 원정대가 1409년에 여진을 복속하고, 그 지역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면서 만든 것이다.

노아간도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25년여 짧은 기간 존속했다. 하지만 이곳의 유일한 유적인 영령사는 최근 태평양으로 나가는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중국의 노력이 더해지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사할린 앞바다의 한 절터를 두고 중국과 러시아의 경쟁이 거세지고 있다.

「 15세기 명나라 원정대가 세운 절
중국의 태평양 진출 명분 될 수도

영토분쟁 우려한 러, 절 흔적 지워
중·러 최근 연대에 중국 향배 관심

20세기 초반엔 일본도 군사 파견
홋카이도~아무르강 철도 계획도

배 25척에 1000명 대규모 사절단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인 아무르 강 하류. 이곳 인근에 있던 사찰인 영령사의 소유권을 놓고 양국의 갈등이 계속됐다.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명나라 시절 아프리카까지 진출한 환관(宦官) 정화의 탐험대는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영락제의 명으로 1405년부터 1430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서 총연장 18만5000㎞에 이르는 지역을 탐사한 원정대를 조직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에 명나라가 아무르강을 따라 사할린 앞바다로 원정대를 파견한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명은 아무르강 일대를 따라서 사는 여진족을 누르기 위해서 여진족 출신의 명나라 환관 이시하(亦失哈)의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시하는 2년간 준비 끝에 1411년에 배 25척에 10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끌고 아무르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명나라 원정대는 아무르 곳곳에 사는 여진족에게 예물과 벼슬을 주며 그들을 위무했다.

이시하는 원정대의 행적을 과시하기 위해 1413년 아무르강 절벽 위에 관음상을 모신 영령사를 세웠다. 중국어·몽골어·여진어로 적은 기념석비도 세웠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은 곧바로 그 흔적을 없애버렸다. 다시 9년 뒤에 이시하 원정대가 절을 재건했지만, 이 역시 얼마 후 파괴됐고, 이름만 남아 있던 노아간도사마저 1434년 폐지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러시아의 손에 들어간 영령사비

석양에 물든 아무르강 하구.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영령사는 이시하가 활동한 지 약 2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조명을 받았다. 이 지역으로 러시아인이 진출하면서다. 당시 러시아 코사크인들은 아무르강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오다가 언덕 위에 쉽게 눈에 띄는 이 비석과 탑을 발견했다.

그리고 1809년, 당시 사할린을 넘어 아무르강 일대를 탐사한 일본인 탐험가인 마미야 린조(間宮林藏)도 영령사를 일본에 보고했다. 중국은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극동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긴 후에야 영령사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됐다. 이에 중국 지리학자 조정걸(曹廷傑)은 1885년 석비를 탁본해서 본국에 알렸다. 조정걸은 또한 만주에 중국인을 이주하고 조선을 청나라에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중국의 만주 팽창 정책 초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중국의 혼란을 틈타 극동 지역을 차지한 러시아는 자칫 영령사 때문에 중국과의 영토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영령사 석탑을 폭파하고 석비는 블라디보스톡 주립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영령사 자리에는 러시아 정교회를 세웠다.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교회를 파괴했다. 소련은 그곳에 러·일 전쟁 때 쓰고 남은 커다란 대포를 세워서 자신들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영령사 발굴한 러 고고학자 의문사

19세기 러시아 선원이 기록한 영령사 유적.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1960년대 후반 소련과 중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고조되면서 영령사에 대한 연구는 금기시됐다. 19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진 직후 러시아 고고학자 아르테미예프(1958~2005)가 영령사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냈다. 명나라 이시하 원정대가 서로 약간 떨어진 곳에 두 개의 절을 세웠으며, 명나라 이전인 원나라 시절에도 건물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기와와 주춧돌 같은 유물도 발굴했다.

하지만 생활도구나 토기처럼 사람이 직접 살았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이시하 원정대가 상징적으로 건물만 세운 것으로 조사됐다. 아르테미예프는 10여년간 발굴을 마치고 2005년에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간 베일에 가려 있던 영령사의 실체를 밝혀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불행하게도 그의 마지막 책이 되고 말았다.

영령사가 있었던 트이르 절벽. 지금은 러·일 전쟁에서 사용했던 대포가 있다. 러시아 고고학자 아르테미예프 보고서에서.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2005년 12월 말 아르테미예프는 자택 현관 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 보고서를 발표한 지 고작 몇 달 후였다. 48세 나이, 한창 연구에 몰두할 때였다. 살인범은 그가 집을 나서기 위해 현관을 여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절도 흔적도 없었다. 뜨내기 강도가 아니라 청부살인일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범인은 끝내 못 찾아 현재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아르테미예프는 황금이나 보물을 발굴한 적이 없다. 그는 대신 중·러 분쟁의 중심인 알바진요새·네르친스크 요새 등을 탐사했고, 아무르강 하류의 영령사까지 조사했다. 그의 연구 성과가 자칫 정치 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돌았다.

19세기 열강들의 영토 싸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 전시 중인 영령사 비와 영령사 중건비.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명나라가 설치한 노아간도사와 영령사는 만주에서 사할린과 캄차카반도로 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후에 이곳에서 성장한 여진 세력은 청나라를 세우며 중원을 차지했다.

영령사는 동아시아와 태평양 연안을 잇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19세기 열강들의 침략과 함께 다시 부각됐다. 태평양을 통한 동아시아 진입로를 두고 쟁탈전이 일어났다.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캄차카반도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영령사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 아르테미예프 박사 보고서에서.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20세기 초반에는 일본이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1920년 러시아 적군파와 한인 독립군 연합군이 일본과 충돌한 ‘니항사건’이 대표적이다. ‘니항’은 영령사에서 멀지 않은 아무르강 하류에 있는 항구인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를 가리킨다.

니항사건은 러시아가 혁명으로 혼란한 틈을 탄 일본이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으로 파병한 군대를 아무르강으로 옮기면서 시작됐다. 당시 니항에 주둔한 일본군이 약속을 어기고 적군을 공격하자 이에 반발한 적군이 니항의 일본인을 몰살한 것이다.

한국 학계도 신석기 유적 발굴

한국 고고학계에서도 이 지역을 조사한 적이 있다. 2000~2002년 국립문화재연구원과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6000년 전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인 ‘수추섬’을 이곳에서 발굴했다. 필자도 당시 조사에 참여했는데 한국에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아쉽게도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중국 지도에 표시된 명나라의 강역. 동쪽 오호츠크해와 사할린까지 표시했다. 원 모양이 영령사 자리다.

반면 일본 도쿄대 고고학자들은 해마다 이 지역을 탐사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홋카이도와 사할린을 통해서 아무르강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아무르강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중국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중국은 지난 10여년간 세계를 중국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다는, 이른바 일대일로라는 원대한 구상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그 루트는 인도양과 동남해로 이어질 뿐 중국의 동쪽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북한이 14㎞ 정도의 국경을 형성하고 있다. 과거 중국은 태평양으로 나가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지만 아직 별다른 소득이 없다.

우크라 전쟁과 ‘신 유라시아 연대’

고고학자 아르테미예프.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상황이 바뀌고 있다. 미국 중심의 서방에 맞서서 러시아는 중국·튀르크예·인도 등 유라시아 강대국과 연대를 가속하고 있다. 가히 ‘신(新)유라시아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때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태평양으로 나가려는 중국의 시도도 갈수록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의 모든 역사 지도에는 이미 러시아 극동은 물론 사할린·쿠릴섬과 오호츠크해 일대까지도 고대 중국의 영역으로 표시돼 있다. 중국으로서는 앞으로 영령사를 근거로 자신들의 입장을 더 강하게 내세울 것이다.

아무르 지역을 둘러싼 역사 분쟁이 눈앞의 정치적인 다툼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역사 분쟁을 앞세워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중국이나 일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생소하지만 우리가 러시아 극동과 아무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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