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간 큰 사내의 화무십일홍…원리 원칙으로 쌓은 성은 왜 무너졌나

이종길 2023. 3. 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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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카지노'…차무식 통해 엿본 우리 사회 축소판
욕망에 휘둘린 순간의 선택, 올곧았던 주인공 몰락 초래
권력에 대한 클리셰 깨뜨려…액션 대신 표정으로 폭력 그려

디즈니+ '카지노'의 주제는 1화 두 번째 신에 요약돼 있다. 주인공 차무식(최민식)이 수하 양정팔(이동휘)과 자동차에서 나누는 대화다.

"아, 형님. 권무십일홍이라고 아세요?" "뭐?" "아, 꽃이요. 형님. 열흘 동안 붉을 수가 없다. 벚꽃도 개나리도 열흘 지나면 다 뒈진다. 그런 뜻이죠. 보세요. 꽃들이 다 졌잖아요, 지금." "권무가 아니라 화무라고 하는 거야. 화무. 화무십일홍. 꽃을 권력에다 비유한 말이야, 인마. 좀 책 좀 봐, 어? 권력이고 인생이고 다 무상하다, 다 허망하다, 부질없다 뭐, 이런 뜻이야."

차무식은 밑바닥부터 온갖 노력을 투하해 필리핀 칼리즈의 실세로 부상한다. 가장 큰 카지노를 운영하며 부와 권세를 모두 누린다. 맹렬한 형세는 욕망에 눈이 멀면서 쇠하기 시작한다. 양정팔과의 대화는 그 시발점에 배치됐다. 차무식은 화무십일홍의 섭리를 알면서도 미봉책이나 편법에 거듭 기댄다. 수렁에 빠진 차처럼 헛바퀴만 돌린다.

강윤성 감독은 "인간의 망각과 나약함을 그리고 싶었다"며 "시청자가 카지노라는 낯선 세계에서 인생을 돌아보길 바랐다"고 밝혔다.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게임보다 내부에 흐르는 욕망의 기운을 전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제각각 방향은 다르지만 욕망을 충실히 따른다. 교차하는 순간, 어제 동지는 오늘 적이 된다. 운영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같이 랜턴에 몰려드는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타죽는다. 일련의 과정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에 접근하고 싶었다."

실체는 권력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수면 위로 부상한다. 첫째는 권력으로 이어진다는 이상적 특성의 별무효과(別無效果)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운이 좋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인식된다. 하지만 인간은 무리의 힘과 관계없이 항상 같은 특성과 역량을 발휘한다. 물론 어떤 상황에선 개인적 특성이 힘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강력해질 수 있는 개인의 특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차무식도 예외가 아니다. 겉보기에 승승장구의 비결은 담대한 성격이다.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최대 무기는 독으로 작용한다. 그는 필리핀에서 카지노를 경험하면서 승부욕을 주체하지 못해 전 재산을 탕진한다. 고영희(이혜영) 파스테라 회장이 딴 큰돈이 사라졌을 때는 대놓고 책임을 회피해 화근을 만든다. 다니엘(벰볼 로코)과 존(김민)의 만류에도 수하들을 이끌고 라울(에피 퀴존)과 호세(제프리 산토스)에게 복수해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강 감독은 최무식의 현재와 과거를 두루 제시함으로써 담대한 성격의 양면을 보여준다. "차무식의 역사를 알아야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모두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장소인 카지노만 해도 그렇다. 아버지 차경덕(김뢰하)은 노름꾼이었다. 어린 차무식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보다 힘이 센 상대 앞에서 겁 없이 덤비는 성격 또한 다르지 않을 테고."

둘째는 권위나 계급이 권력의 위치와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무식은 민석준(김홍파) 칼리즈 호텔 회장이 고용한 카지노 책임자지만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다. 남아도는 콤프(호텔 마일리지)로 정기 세미나를 후원해 필리핀의 시장, 주지사, 경찰청장, 장군 등과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차무식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하지만 기관의 리더라는 이유만으로 조직을 좌지우지하진 못한다. 최상층에서 권위를 확보했을 뿐 권력이 미미하다. 사실상 다니엘의 꼭두각시들이다. 차무식은 다니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워낙 전설적인 사람이라 이 바닥 사람들은 다 알지. 마약왕 엘차포가 있다면은 다니엘은 도박의 신이야. 필리핀에 있는 모든 카지노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 나는 순간 동아줄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불일치는 차무식과 서태석(허성태)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서태석은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 툭하면 신경질을 부리고 후배들을 괴롭힌다. 선배 격인 차무식 앞에서도 거침없다. 차무식은 정반대다. 사내 체육대회에서 우스꽝스러운 머리띠를 하고 피구를 할 만큼 직원들과 허물없이 지낸다.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가 도발하기 전까진 발톱을 숨긴다. 서태석은 그걸 보지 못해 실질적 권력을 잡았다고 착각한다.

강 감독은 첨예한 대립을 영화 '범죄도시(2017)' 등에서 발휘한 액션 대신 감정 충돌로 보여준다. 대본에 있던 액션 신을 대거 걷어냈다. 권력의 방향이 폭력보다 얼굴에서 더 잘 나타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최민식의 조언이 한몫했다"고 말했다. "보여주기식 액션으로는 이야기 전달에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 순간 무릎을 치고 반성했다. 사실성을 불어넣을 자신감이 생기더라. 배역들의 얼굴이 감정적으로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셋째는 권력을 얻는 과정에 반드시 조작과 강압, 잔혹한 행동이 뒤따른다는 오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오셀로'를 비롯한 각종 문학·영화에선 비열하고 간악한 행위가 권력을 향한 지름길로 나타난다. '카지노'는 같은 피카레스크(악인이 주인공인 작품)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차무식은 후배들에게 도박장 소유권을 넘기면서 원금만 받고, 카지노 에이전트들에게 커미션을 두둑이 챙겨준다. 민석준 회장의 자리를 넘보지도 않는다. 누구보다 의리와 인정을 중시한다.

그렇게 확보한 권력은 김소정(손은서)·필립(이해우)의 배신에 격분하면서 부패하기 시작한다. 검은돈의 유혹조차 뿌리치지 못할 만큼 타락한다. 강 감독은 "한순간 잘못으로 순탄하던 인생이 꼬여버린 것"이라며 "나름 원칙에 근거해 견고하게 쌓은 성조차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시즌1에 차무식의 과거가 지나치게 많이 담겨서인지 산만하다는 평이 많더라. 대본과 연출을 병행한 창작자로선 포기할 수 없었다. 차무식이 나름 올곧은 사람이었다는 전사(前史)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박 세계에서 부정하게 돈을 벌지 않았다. 살인과도 거리가 멀었다. 원리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융통성을 발휘하는 좋은 형과 같은 존재였다. 권력과 욕망은 그런 사람조차 한없이 취약하게 만든다. 차무식은 그걸 경계해야 했다. 본능이 아닌 이성적으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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