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은행 파산이 남의 일일까

이상렬 입력 2023. 3. 23. 01:12 수정 2023. 3. 23.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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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모바일 뱅크런 출현
건전성 좋아도 시장에 찍히면 끝
예전 같은 공적자금 투입 어려워
이상렬 논설위원

은행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불가결한 존재다. 자금을 중개·공급하는 은행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망가졌다고 함부로 퇴출할 수도 없다. 2008년 그걸 경험했다. 미국이 부실 덩어리인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를 시장 원리대로 파산시켰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국제금융의 중심인 미국과 유럽에서 다시 대형 은행 파산과 몰락이 벌어지고 있다. 유럽에선 167년 전통의 스위스 2위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가 UBS에 인수돼 사라지고 있다. 고객 비밀보장으로 유명한 스위스 은행사의 증인이었다. 미국에선 벤처기업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미국 상당수 벤처기업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에 이어 스위스 2위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가 몰락하면서 국제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사진은 SVB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두 은행 침몰의 공통점은 무시무시한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이었다. CS는 스위스 중앙은행이 540억 달러(약 71조원) 긴급자금 지원에 나섰지만, 하루에 100억달러(13조원)가 빠져나가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SVB는 자금 위기가 알려진 다음 날 하루에만 420억 달러(약 55조원)의 예금이 인출됐다. 여기엔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거액을 이체할 수 있는 모바일 뱅킹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은행의 비운(悲運)은 간과해선 안 될 시사점을 던진다. 신뢰를 잃은 은행에서 뱅크런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디지털 금융 시대에선 차원이 달라졌다. 고객이 빛의 속도로 이탈한다.
한국도 알아주는 모바일 뱅킹 강국이다. 그 위력이 발휘된 사례가 2019년 1월 KB국민은행 파업이다. 19년 만의 총파업으로 고객이 큰 불편을 겪을지 모른다는 은행 측 걱정은 기우였다. 대다수 국민은 파업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거래의 86%를 차지하던 비대면 거래(스마트폰·인터넷·ATM 등) 때문이었다. 파업은 별 성과가 없었고, 노조는 인력 과잉 아니냐는 눈총만 받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모바일 뱅킹이 더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1일 이체 최대 5억원에 24시간 가능한 모바일 뱅킹의 특성, 메신저를 타고 급속도로 퍼지는 정보 확산성 등을 고려하면 모바일 뱅크런 리스크는 실재한다고 봐야 한다.
국내 은행권의 건전성 양호 논리도 짚어볼 대목이다. CS와 SVB 두 은행 모두 대출에 문제가 없어도 위기를 맞았다. SVB는 주로 미 국채 등 안전자산에 투자했다. CS도 여러 스캔들이 있긴 했지만 보유 자금이 넉넉했다. 다만 살얼음 같은 국제금융 시장에서 유럽 은행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로 지목됐을 뿐이다. 집단 불안심리의 타깃이 되면 고객 이탈과 자산가치 폭락 때문에 건전성은 순식간에 나빠진다.
예전 같은 정부 구제금융이 어렵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각국 정부는 은행의 모럴 해저드와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에 질려 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처음부터 “납세자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않는다면 방법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넘기는 인수합병(M&A)밖에 없다. 스위스 정부가 CS를 UBS에 인수시킨 결정이 그것이다. 미국도 SVB 인수자를 열심히 찾고 있다. M&A엔 대가가 따른다. 중복 사업부와 지점을 통폐합해야 하고, 인력을 내보내야 한다. UBS와 CS 합병의 경우 9000명이 해고될 것이란 보도가 나온다.
국내 은행 역시 다시 위기를 맞는다면 공적자금 투입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고금리 장사와 성과급 파티에 분개한 여론은 은행에 호의적이지 않다. M&A 카드가 채택될 가능성이 크고, 은행원 상당수는 일자리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자 장사에 치중하는 국내 은행권이라고 해서 미국과 유럽발 은행 위기의 안전지대라고 방심해선 안 될 일이다. 국제금융 시장에 불이 붙으면 신용 경색을 거쳐 한국에 상륙하곤 했다. 정부 실력도 한층 중요해졌다. 미국과 스위스 당국은 뱅크런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 정부도, 은행권도 시장에서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위기가 오고 나면 그때는 늦다.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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