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성향 '민족일보' 창간에 참여

김삼웅 2023. 3. 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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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동은 언론계에 있을 때에 이승만 정권이 정적 조봉암을 사법살인하고 진보당은 해체시키며 혁신계를 탄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인 조규태가 진보당에 참여하면서 함께하자고 하는 것을 언론계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고 사양하여 화를 면한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혁신계 전반적인 인식이었을 것이다.

김자동이 청년기 한 때 열정을 바쳤던 <민족일보> 를 창간한 주역 조용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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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32] 당시 언론의 지형은 보수일변도의 구조였다

[김삼웅 기자]

 민족일보 창간호
ⓒ 오마이뉴스
 
김자동은 언론계에 있을 때에 이승만 정권이 정적 조봉암을 사법살인하고 진보당은 해체시키며 혁신계를 탄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수세력의 타락상이 집약된 폭압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 당시 민주당의 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진보쪽에 관심이 많았다. 동정심과 이념적 경향도 함께 하였다. 지인 조규태가 진보당에 참여하면서 함께하자고 하는 것을 언론계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고 사양하여 화를 면한 적도 있었다. 

혁신정당이 7.29 총선에 참패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준비 부족과 내부 분열, 여기에다 자금과 선거를 치를 역량도 부족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나오면 지지해줄 거다"라며 국민의 지지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자만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기울어진 운동장', 즉 친민주당 일변도의 언론 보도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정한 게임은 이뤄지기 어려운 법이다. 조용수를 비롯해 혁신계 내부에서 "진보언론이 하나 있어야 되겠다"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석 4)

이와 같은 생각은 혁신계 전반적인 인식이었을 것이다. 진보 언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30세의 청년 조용수(趙鏞壽)는 경북 청송에서 사회대중당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김자동이 청년기 한 때 열정을 바쳤던 <민족일보>를 창간한 주역 조용수는 누구인가. 

조용수는 1930년 4월 24일(호적상 4월 20일) 경남 진양군 대곡면 단복리에서 태어났다. 작은 아버지 조경주는 <대구신보>, <시사신보> 사장을 지내고 2, 3, 4대 국회의장으로 자유당 원내총무를 두 번이나 지낸 정치인이다. 어머니는 만석꾼의 딸로 진주의 명문가였다.

어려서 자식이 없는 외삼촌 하만복의 집에서 자랐다. 하만복은 과도정부 입법의원, 반민특위 위원,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역의 명문가였다. 삼촌과 외삼촌이 국회의원을 지내 자연히 조용수도 일찍부터 정치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나와 진주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동기생 중에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이 있었다. 6.25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가니 외삼촌 하만복 의원의 '비서'로 일하였다. 

근무를 계속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메이지대학에 입학하고 민단 기관지인 <민주신문>과 개인이 운영하는 <국제타임스> 논설의원으로 언론인의 기량을 닦았다. 국내에서 조봉암에 대해 재판이 계속되자 구명운동에 앞장서고, 일본 정부의 재일교포 북송에 적극 저지운동을 벌였다. 

10년 만에 귀국하여 7.29 총선에 청송에서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개인의 석패에 못지않게 넓게는 한국민주주의, 좁게는 혁신계의 문제였다. 그 해결의 방안으로 신문 창간을 서둘렀다. 

당시 언론의 지형은 보수일변도의 구조였다.
신문창간을 서둘렀다. 진보적인 민족지를 구상하였다. 이같은 소식은 김자동에게 전해지고 그의 성향을 아는 자식들의 권유가 있었다. 쟁쟁한 혁신계 인물들이 포진하였다. 서상일(사회대중당 대표), 윤길중(전 진보당 간사장), 김달호(사회대중당 중앙집행위원장), 송지영(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이건호(언론인) 등이다.

김자동은 초대 편집국장 겸 주필로 새 정권 이종률로부터 정치부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국장의 제안을 사양했다. 새로 창간하는 신문의 대외공신력 등을 감안할 때 아무래도 정치부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주석 5)

겸양과 미덕이었다. 4월 혁명 공간에서 진보신문의 정치부장은 그 위력이 막강한 자리였다. <조선일보>에서 외신·정치부에서 필명을 날렸기에 얼마든지 꼬리 찰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스스로 정치부 일선기자로 자임하였다.

주석
4> <회고록>, 347쪽.
5> 앞의 책,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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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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