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망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고백을 하는 이유

선채경 입력 2023. 3. 2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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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채경의 어차피 살 거라면 - 마지막회] 멜버른은 '실패하기 좋은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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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채경 기자]

"어차피 최저임금 받고 살 거라면, 최저임금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누군가 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노력하면서 큰돈을 벌 기회'를 노렸다기 보단, '노력하다 망해도 괜찮은 세상'이 궁금했다. 21.28달러(AUD, 우리 돈으로 약 1만 8500원), 호주는 법정 최저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목적지를 멜버른으로 정한 이유도 '살기 좋은 도시'가 궁금해서였다.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서 멜버른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7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도로와 공원 등 사회 기반 시설 항목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든든한 기반이 지탱하는 삶이란 어떤 걸까? 보통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이유는 돈, 영어, 경험 셋 중 하나다. 나에겐 기대와 호기심 충족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멜버른 칼턴 가든스(Carlton's Gardens)에서 한 시민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선채경
 

1년 준비한 워홀은 한 달여 만에 짧은 소동으로 끝났다. 지난달 17일,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MBC 예능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나 직업 체험 웹 예능 <워크맨> 같은 걸 하고 돌아왔다는 게 정확하다. 집 구경만 열 번 했고, 일자리는 수습 단계를 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이 실패를 "오히려 좋다" 말하고 싶다. 바뀐 환경이 나를 바꿀 수 없었다. 대신 진짜 나다운 나를 볼 수 있게 해줬다.

돌이켜보면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원했던 게 아니었다. 무엇이든 내 인생에 기대할만한 일이 일어나길 바랐다. 한국에서 나는 이런저런 제약을 잔뜩 지고 다니느라 무기력했다. 한국이라서, 여자라서, 경력이 없어서, 돈이 모자라서, 나이가 이래서, 등등.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흐물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그 풍선에 주입한 헛바람이었다.

워홀이 나의 모든 제약을 없애주진 못했다. 하지만 없는 셈 칠 수 있었다. 나는 '어차피 떠날 건데 뭘 망설여?'라는 마음으로 2022년을 아낌없이 살았다. 멀어졌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러 다녔다. 사과와 감사, 사랑을 표현하길 아끼지 않았다. 이때 가족을 비롯해 여러 인간관계를 회복했다.

하고 싶은 건 망설이지 않고 했다. 예정된 출국일을 2주 앞두고 '오마이뉴스 기자만들기' 프로그램을 수강하기도 했다. 비행기표를 변경하느라 돈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기자들과 연결되는 일이 즐거웠다. 내가 이런 자리를 무척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련 없이 떠나려고 아낌없이 살았는데, 도리어 미련 가득 안고 떠나게 됐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솔직히 "저 내릴게요!" 외치고 싶었다.

멜버른은 '실패하기 좋은 도시'였다
 
 "여기는 무료 트램 존입니다." 멜버른 시내 트램 정거장의 모습이다.
ⓒ 선채경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돈이 떨어질 때까진 도전하기로 했다. 멜버른은 기대한 만큼 좋았다. 이곳에선 실수하고 실패해도 괜찮았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트램을 잘못 탔는데, 자책하지 않았다. 시내 중심지 대부분이 '무료 트램 존'으로 운영된다. 교외로 가거나 기차, 버스를 타도 걱정 없다. 교통카드를 아무리 많이 찍어도 하루 9.2 달러(약 8500원)를 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울창한 가로수 덕분에 산책하듯 길을 헤맸고, 힘들면 벤치에 앉아 쉬었다. 멜버른시의 녹지 비율은 19퍼센트에 달한다. 어디서든 걸어서 공원에 갈 수 있다.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햇살은 따듯하고 잔디밭은 폭신했다. '호캉스' 부럽지 않은 '공캉스(공원 바캉스)'였다. 이 도시에서 실패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 '살기 좋은 도시 1위'가 되었는지 알 만했다.

그 좋은 곳에서 왜 더 도전하지 않았냐면, 한국에 두고 온 꿈에 미련이 남았다. 나는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로서 글을 써왔다. 글쓰기는 호주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가 가장 연결되기를 원하는 세상은 한국에 있었다. 앞선 연재 기사 두 편에 썼던 이야기와 같다. 과로하기 위해 '가짜 커피'를 들이키는 일, 나의 성장 기반이었던 도서관 예산이 삭감되는 일, 나는 이런 일을 멀리서 관망하듯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실패할 거라면 맘껏 기대하자
 
 멜버른은 다양한 '그래피티' 문화로 유명하다. 예술가 프루 스티븐슨(Prue Stevenson)이 자신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주제로 그린 그래피티의 일부분.
ⓒ 선채경
 
나를 알기 위해 비싼 값을 치렀다. 어림잡아 5000 달러(약 437만원) 정도? 하지만 괜히 떠났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나와 아무 상관없는 곳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워킹홀리데이든, 여행이든, 꼭 해외가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나처럼 5000달러나 낼 필요 없다). 새로운 환경은 나답지 않은 것들을 덜어내고 나다운 것을 보여준다.

과거의 나는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 두려움을 덜기 위해 한국에서 8000km 떨어진 호주로 왔나 보다. 워킹홀리데이는 실패하지 않으리란 기대, 착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대해야만 실패에 지치지 않는 사람이다. 기대해야 아낌없이 살 수 있다. 이건 착각이 아니다.

물론 이렇게 빨리 돌아온 사실은 조금 부끄럽다. 부끄러운 고백 하나 더. 나는 이 글을 쓰는데도 여러 번 실패했다. 과연 이걸 쓸 필요가 있나 오래 고민했다. 자기계발서, 합격 수기, 성공담이 가득한 세상이다. 우여곡절을 말하는 것마저 시상대에 오른 사람들의 특권처럼 보인다.

실패를 쓰기 위한 참고문헌이 간절했다. 나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책 <오색찬란 실패담>에서 도움을 받았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라는 영화 속 대사와, "나는 멋지지 않은 사람이니까, 멋지지 않은 무언가를 쓸 능력은 충분했다"는 정지음 작가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이제 얼버무리지 않고 또박또박 쓰겠다. "저 망했고요. 부끄럽습니다." 이런 글이 어디에 나갈 수 있나 싶은데, 이런 글이라도 있어서 덜 외롭길 바란다.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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