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영어유치원 보내셨습니까

이경원 2023. 3. 22.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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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대상 영어학원(일명 영어유치원) 실태를 취재하다 접한 가정법원 판결이 하나 있다.

부산의 한 어머니는 남편 수입으로 두 딸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기 어려워 월 150만원 받던 점원 일을 관두고 술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자녀 미래를 따지려 과거를 계산한 판결문에는 "그 동기가 남편이 자녀 학원비 등을 충분히 지급하지 못한 데 있더라도"란 구절이 있다.

게임하는 남편을 남겨둔 채 남모를 직장으로 향하던 어머니도 딸들이 영어유치원에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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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이슈&탐사팀장


유아 대상 영어학원(일명 영어유치원) 실태를 취재하다 접한 가정법원 판결이 하나 있다. 부산의 한 어머니는 남편 수입으로 두 딸을 영어유치원에 보내기 어려워 월 150만원 받던 점원 일을 관두고 술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월 400만원을 벌어 딸들 교육비와 대출이자로 쓸 수 있었다. 이 어머니는 얼마 뒤 술집에서 만난 이와 함께 있다가 남편에게 들켰다. 아내가 일하는 곳을 몰랐던 남편이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아내도 남편이 생활비를 제대로 안 줬다며 이혼과 양육비를 청구하는 반소를 냈다.

법원은 둘이 이혼하라 했고 파탄의 책임은 어머니 쪽에 있다고 봤다. 몰래 한 술집 근무와 부정행위는 혼인생활이 허용하는 범위 밖에 있다는 판결이었다. 법원은 그러면서도 두 딸의 친권자 및 양육자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지정했다. 두 딸이 집에 방치되는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면 쫓겨난 어머니가 옷과 준비물을 구입해 주고 있었다.

깨지고 흩어진 가정사를 영어유치원 학부모의 모습으로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다. 다만 단 한 사람 몫의 개별성을 전제로, 저 어머니의 선택과 이 사회의 교육 풍경 사이에 닮은 데가 전혀 없을까. 자녀 미래를 따지려 과거를 계산한 판결문에는 “그 동기가 남편이 자녀 학원비 등을 충분히 지급하지 못한 데 있더라도”란 구절이 있다. 가정마다 공교육으론 부족하다는 믿음으로 귀천 없는 가처분소득들을 떼어내고 있다. 아들딸 위한다며 내놓고 말 못 할 온갖 일을 다 하는 건, 잘 배워 신문에 이름이 오르는 높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판결은 두 딸이 영어유치원 다니길 좋아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판단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애초 이 사회가 그런 걸 생각하지도 않는다. 생후 18개월도 한다는 영어 조기교육이 자녀 교육인지 부모 만족인지 학자들도 얼른 말하지 못했다. 자식 농사란 말부터가 농부의 관점이며, 때론 한국인 특유의 한(恨)이 그 농부들을 편든다. 농부 욕심이 너무 커도 작물이 상한다고 한다. 부정(父情)이 부정(不正)으로 변하는 장면, 교육의 끝에 교훈은 온데간데없는 광경도 있다. 학사 경력을 위조해준 부모가 실형을 선고받은 직후 그 자녀가 대중 앞에 나와 한 말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떳떳하다”였다.

만 4세 아이의 영어유치원 합격 통보에 부모가 대학입시 통과와 같은 안도감을 느끼는 데에도 이유는 있다. 시대가 점잖게 과열을 탓할 뿐 조금도 바뀌지 않는 사이 사교육 코스들은 공교육보다 촘촘하게 설계됐다. 수학은 어느 학원에 가야 하고 또 어느 대학의 무슨 경시대회에서 입상도 해야 한다. 그렇게 모든 개인이 합리적 선택을 이어갈 동안 그들의 공동체를 표현하는 말은 왠지 점점 고달프고 사나워졌다. 자녀들 앞의 문을 남들보다 잘 찾는 부모들은 “기사 쓸 때 조심하라”는 덕담을 잊지 않았다. 유명 영어유치원 학부모는 법조인도 많고 재력도 상당하니 잘 처신하라는 말이었다.

영어유치원을 소수 전유물로 보는 시각은 낡았다 한다. 이제 그건 차라리 후대를 위해 어떻게든 얻어다 줘야 할 사다리처럼 보인다. 게임하는 남편을 남겨둔 채 남모를 직장으로 향하던 어머니도 딸들이 영어유치원에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평소 선행학습과 계층 문제를 근사하게 말하던 이들도 “선생님도 보내셨습니까” 물으면 멈칫했다. 그 잠깐의 침묵 속에는 내 아이 출발선이 다른 아이 앞에 있길 바라는 부모의 본성이, 그리고 그 본성마저 어떤 집에선 허락되지 못한다는 어렴풋한 깨달음이 섞여 있을 것이다. 양육받던 아이들이 양육할 때면 이 답답함이 옅어질까, 아니면 짙어질까. 늘 좌우의 문제라 여기지만 실은 상하의 문제다.

이경원 이슈&탐사팀장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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