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9] 불행중 다행

전병선 2023. 3. 2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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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인 목사

“하나님, 내 엉덩이뼈가 산산이 부스러졌을지라도 저를 지으신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래대로 복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온 사방이 유리같이 반질거리는 얼음 바닥에 앉아서 기도를 드렸다.

얼마가 지나서 움찔거려 보니, 일어설 수는 없어도 그런대로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돌려 내동댕이쳐 있는 쓰레기 봉지를 길가에 서 있는 쓰레기통 옆으로 밀어 내리고 도망가 있는 슬리퍼를 움켜서 차고 안으로 던져 넣었다. 엉금엉금 차고로 들어와서 1층 집안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매달리듯 올라와 소파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상기도 날이 밝지 않았는데 사위와 딸이 출근하려고 2층에서 내려왔다. “밖이 온통 얼음판이다. 현관문을 열고 발을 내디딜 때부터 조심해라.”

생각을 해보니, 내가 미리 나가떨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미리 겪지 않았더라면 내 자식들이 내 꼴이 날 뻔했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 두어 달을 자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어기적거리면서 집안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돌보는 가운데 서서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이다.

2년 후, 그 동네 medical team(약국/병원)에서 60세 이상의 노인들을 위한 무료건강검진이 있었다. 청력, 시력, 치매 검사를 비롯해서 폐활량 검사와 엑스레이까지 한나절이 걸리는 총체적인 검사였다. 검사를 받고 며칠 후, 엑스레이 촬영을 했던 의사에게서 편지가 날라왔다.

내게 보내준 사진에는 내 엉덩이뼈가 깨졌던 흔적들을 증언하고 있었다. 치료받으라는 편지가 몇 번이나 왔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60세였고 Medicare card는 65세가 되어야 받을 수 있으므로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오늘날까지 잘살고 있다. 오직,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고로, 넘어졌을 때 특히 뼈가 깨지거나 부서졌을 것 같은 경우에는 잠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곧바로 움직이면 치료가 더 힘들어진다고.

*오십견 – 평지에서 구불구불 10분을 올라가야 하는 그 동네에 사는 동안, 한쪽 팔이 위로 올릴 수가 없이 아파서 한 손으로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집안일들을 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병원을 가는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아픈 팔을 시간 되는대로 안수하며 기도하는 일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그 현상은 6개월을 기점으로 완화되어 가면서 서서히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게 되었다.

*손녀의 독감 – 이제 겨우 네 살 된 손녀, 출생 100일 무렵부터 내 손으로 씻기고 먹이고 안고 업으며 데리고 자는 내 소중한 새끼의 증상이 심상치 않아서 아이의 얼굴에 내 얼굴을 붙인 채로 끌어안고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제가 대신 앓게 해 주세요!” 신기하게도 그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손녀는 괜찮아졌고, 나는 그야말로 지독한 독감을 앓게 되었다. 입에서 자동으로 신음이 나올 정도였다. 어른에게도 이렇게 심한 독감을 어린애가 앓게 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끙끙 앓고 나서 나는 후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2022년 2월, 코로나 19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잃어버렸던 그 후각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사고로 기억을 잃었던 사람이 비슷한 사고로 기억을 회복하는 것처럼.

*중풍 - 이게 뭐지. 꼭 무슨 전자파 같은 것이 등으로 ‘찌.리.리.릭~’ 지나간다. 그때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게 되었으므로 낮을 활용해 San Antonio Collage에서 오픈한 Intensive English Class에 등록한 상황이었다. 시청할 TV Chanel을 찾을 때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것처럼. 전류가 시도 때도 없이 등으로 무단 종횡을 하는데, 서투른 운전사인 나는 45분이나 걸리는 학교로 가며 오며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Intermediate class와 advance class를 마치게 되었다. 틈이 날 때마다 내 손으로 내 등을 때리며 안수 기도를 드리면서.

LA에서 1년, 샌 안토니오에서 7년 총 8년을 두 살 된 손자와 백일 된 손녀를 키우며 훌타임 Baby sitter와 House keeper의 사명을 마칠 무렵, 손자 손녀가 초등학교 학생이 되었고 친구와 사업을 하던 사위가 Southern Baptist Seminary를 졸업하고 2011년 2월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가운데 Colorado에 사는 큰딸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한다. 엄마의 홀로서기를 도와주겠다고.

2011년 3월 12일 저녁, 큰 사위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리고 13일 이른 새벽, “Mom, time to go!” 큰 사위가 내 방에 앞에 와서 외쳤다. 큰 사위는 그렇게 내 짐이 다 실려 있는 나의 Honda Odyssey를 운전해 Highlands Heights, Colorado 자기들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짐을 풀고, 일단은 작은 아이가 사 준 비행기 표로 한국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내가, 가족들이 몽땅 사는 한국에 나가 사는 게 엄마를 위해서 낫지 않을까 생각들을 한 것 같았다.

글쎄. 인간이나 동물에겐 귀소본능이라는 게 있다. 혹시라도 한국에 나가서 살 수가 있다면 한 달 기한으로 삼고 서울에 나와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가늠을 해 보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큰딸과 사위는 자기들 나름대로 나를 미국 사회에 접붙여 주기 위해 애를 써 주었다. 그러나 60이 넘은 나이에 어디 가서 낀단 말인가. 결국, Denver의 한인타운으로 나와서 주방보조 일을 하게 되었다. 최소한 66세에 받으려던 SSA를 65세를 한 달 앞둔 64세에 받기로 서류 작업을 해놓고. 그것만 가지고는 아파트 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가 없으니까.

감사하게도 나는 일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일이 되었든 그 일만의 기쁨이 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호기심이 많고 도전적인 나에게는 별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부엌일이야, 매일 밥을 해 먹고 살아왔고 사는 사람에게는 생소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거의 항상 물바다인 식당 부엌에서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을 하게 되었다. 삶은 냉면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찬물로 박박 문지르며 씻다 보니 닳은 줄도 모르게 다 닳아버린 손톱 손가락 끝의 생살이 바구니에 부대끼는 아픔이란.

그 날도, 넘어질 위기에서 급하게 잡는다고 잡은 것이 스테인리스 화덕의 가장자리. “앗, 뜨거워!” 손을 급히 떼기는 했지만, 오징어나 쥐포처럼 구워진 것은 아니더라도 손바닥이 손에서 “벙~” 떠 버린 느낌.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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