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측근도 못 구하는데 나라를 구할까

입력 2023. 3. 21. 01:21 수정 2023. 3. 21.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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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끝도 없는 정치권 싸움에 국민 정서는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단군 이래 최대 비리’와 ‘검찰이 살인자’라는 논리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다. 더 죽어야 끝날까, 아니면, 이대로 국력을 파탄 낼까. 이런 적이 없었다. 사건의 전모는 수상하기 짝이 없고, 검찰의 행보는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공중(公衆)을 매수하려는 정치권은 참호전을 구축했다. ‘끝까지 간다’는 결의다. 정치인들이 연일 독기를 뿜어내니 참 딱하고 피곤하다.

「 대장의 품격은 책임 지는 것인데
비리 혐의에 충복들만 생명 잃어
‘살인자 검찰’ ‘일제 앞잡이’라며
숨는 대장이 어찌 나라를 구할까

검찰 조사는 원래 살기(殺氣)를 뿜어낸다. 피의자든 참고인이든 한번 불려가 본 사람에겐 악몽이다. 주변을 때리고 옥죄면 평상적 행위도 범법 그물망에 걸려든다. 피의자가 혐의 흔적을 박박 지워도 삭제한 기억을 귀신같이 들춰내는 게 검사다. 늦은 밤 나서는 검찰청의 어둠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무엇보다 인생탑이 무너진다. 정직과 성실로 살아온 사람의 최대 자산인 자존감이 쪼그라들면 극단적 행위가 어른거린다. 범법의 수위와는 상관없이 자신과 가족의 품격을 지켜줄 마지막 수단에 호소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도자 품성론이 나온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논두렁 시계, 친인척 비리, 측근 단속 실패, 요즘 사건에 비하면 당시 검찰은 말할 것도 없이 도를 넘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그는 한국 정치에 내장된 구렁텅이에 자신을 던지는 것으로 수하들과 가족의 품위를 지켰다. 필자는 당시 비통한 심정을 이렇게 썼다. “그 생명공양(生命供養)의 대가로 우리는 한국 정치를 직조하는 ‘운명의 형식’에 대해 눈을 번쩍 떴다.” 이후 14년 동안 우리는 그 운명의 형식을 어떻게 복기해 왔길래 이번에는 충복들의 낙화(落花)를 감당해야 하는가.

‘검찰은 살인자’라는 못된 정치방정식이 상수(常數)라면 대장의 품격도 상수다. 대장은 항상 중심에 포진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일자진을 뒤로 두고 홀로 왜선과 싸웠다. 해류가 바뀌기를 기다리라는 작전명령에 만호들은 대장의 위태로운 독전(獨戰)을 숨죽이며 바라봤다. 명량이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만호들이 해류를 타고 돌진했다. 왜선 300척이 부서졌다. 승전이든 패전이든 책임은 대장의 것이다.

그런데 숱한 비리 혐의에 맞선 이재명의 독전(督戰)에 만호들은 사라졌다. 법률만호, 척후만호, 자금만호, 기획만호, 그리고 행정만호에 이르기까지. 대장선이 ‘결백 깃발’을 휘날리는 현실 앞에 무너진 것이다. 행정만호 고(故) 전형수 비서실장은 유서에 ‘사건 조작이 무섭다’고 극한 두려움을 표현했다. 고인이 두려워한 사건조작의 주체는 누구일까. 행정책임자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집행할 뿐이다. 명령의 주체가 나선다면 행정만호는 그나마 버티지 않았을까.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장을 모르쇠로 비호하는 야당은 진정 ‘운명의 형식’을 복기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고(故) 노무현의 죽음을 욕되게 할 뿐이다.

가치(value)와 효용(utility)을 적절히 구사하는 게 정치다. 대의(大義)를 구제하는 본업에서 효용이 판을 치면 가치가 묻힌다. 문(文)정권이 내세운 ‘정의와 공정’은 시의적절했으나 정책 비효용으로 가치가 무너졌다. 여론이 가치를 구제하는 것도 아니다. 팬덤은 언제든지 바뀔 격류다. 이재명 구출 특공대 개딸들의 행보도 몸을 뒤척일 때가 올 것이다. 팬덤을 외면하면 낭패를 당하고 팬덤에 몸을 맡기면 가치를 상실한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사면초가의 늪에서 여전히 의연하다. 프랑스의 미래가 연금개혁에 달렸음은 개혁 실패 국가에서 이미 입증됐다. 민주투사의 휘광을 독점하고 민중을 대변한다는 소위 진보정치가 오늘날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철 지난 논변과 비속한 말투, 그리고 근거 없는 신학적 증오 속에 익사했다.

익사할 것은 또 있다. 막무가내 반일(反日)신념. 한국인에게 반일은 상수일 터에 그걸 선동해 철옹성을 칠지, 미래의 정기(精氣)로 변환할지가 쟁점이다. 일제에 희생된 중국 인민은 무려 1000만 명에 이른다. 중국 난징학살 희생자 기념관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 중국은 피해보상 요구를 일찍이 접었다. 그런데 우리의 좌파는 징용·위안부 보상방식이 엇나가자 간토대지진을 들고 나왔다. 베트남은 2000년 역사에서 중국 기마군단에 수십 차례 짓밟혔다. 100년을 지속한 왕조가 없을 정도지만 베트남은 역사적 상처를 삼켰다. 소국(小國)도 이러한데, ‘일제의 앞잡이’, ‘자위대 군홧발’ 같은 극렬한 레토릭으로 무엇을 건지려 하는가? 시진핑의 중국에는 왜 찍소리 못하는가?

16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서명한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일본에는 도덕적 우위를, 중국에는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일본에는 용서를, 중국에는 효용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미래를 향한 한국의 시선이다. 측근도 구하지 못하면서 어찌 나라를 구하겠는가.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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