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스즈메의 품앗이

이후남 입력 2023. 3. 21. 00:57 수정 2023. 3. 21.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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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선임기자

방학도 아닌데 웬 고교생이, 그것도 교복 입은 여학생이 혼자 여행을 한다. 친척이나 아는 이의 집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동반자, 아니 소지품이라고는 언제 다리 하나가 없어졌는지 모르는 작은 의자와 휴대전화 정도뿐. 어쩌면 우발적으로 잠시 가출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딘가 꼭 찾아가야 할 곳이, 뭔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눈치다.

요즘 흥행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주인공 스즈메의 판타지 섞인 여정은, 현실 감각을 유지하는 다른 인물들에게 이렇게 보이기에 십상이다. 이들은 스즈메가 이 세계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그저 선의로 도움을 준다.

스즈메도 상황을 구구절절 말하진 않는다. 하긴, 이 근처에 폐허가 있느냐고 길을 묻던 청년이 갑자기 의자로 변했고, 그래서 청년을 도와 문을 닫아야 하고, 안 그러면 문에서 엄청난 재난이 쏟아져 나온다는 식의 얘기를 들려준들 단번에 납득할 사람은 많지 않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사진 미디어캐슬]

이는 같은 감독의 전작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 소녀도 경험했던 터. 도쿄에 사는 소년과 몸이 바뀌는 독특한 경험을 통해 재난을 미리 알게 된 소녀는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하지만 친아버지인 마을 이장조차 소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물론 스즈메가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라도, 스즈메 역시 상대를 돕게 된다. 남이 못 보는 걸 보는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다. 청소나 설거지, 어린아이 돌봐주기 등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다. 이런 상호부조의 세계는 감독의 또 다른 전작 ‘날씨의 아이’에서 주인공인 가출 소년이 겪은 세계와도 다르다. 섬에서 도쿄로 가출한 소년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전에 대도시의 비정함부터 맛봐야 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와 함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으로 불린다. 이야기와 초점은 저마다 다르지만, 세 편 모두 재난으로 비극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는 마음이 담긴 판타지물이다.

그중에도 ‘스즈메의 문단속’은 실제 재난과 구체적 접점이 뚜렷하다. 개봉 이후 널리 알려진 대로, 스즈메의 여정은 3·11 동일본대지진이나 꼭 100년 전 관동대지진을 비롯해 일본에서 대규모 재난이 벌어졌던 실제 지역을 관통한다. 스즈메를 도와주는 이들이 사는 마을과 도시 역시 각각 폭우와 지진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재난 당시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등 이 작품의 전개 방식이나 극 중 장치는 여러모로 사려 깊다. 스즈메가 길에서 만난 타인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그렇다. 일상의 선의를 환기하는 한편 재난이 파괴한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이 애니메이션의 지향을 헤아리게 한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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