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철학자 셰프와 먹고마시즘

이마루 2023. 3. 21.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셰프의 테이블과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길어올린 셰프의 철학.

철학자 셰프와 먹고마시즘

마스크를 벗어버린 이후 여기저기서 환해진 입을 통해 식감을 폭발하는 방송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마침 과메기 철. 나는 꽁치 과메기에 물미역, 봄동, 김 그리고 쪽파, 초고추장을 곁들이며 소주를 한 잔 들이켠다. 〈술꾼도시여자들〉을 통해 술도 드라마로 대리만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번엔 직접 적셔주리라! 캬! 최근 나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면 ‘글렌캐런’ 잔에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이다. “요즘 위스키 마시는 사람들은 응당 이 잔에 먹어야 한다”고 지인이 선물한, 보라색 엉겅퀴꽃을 본떠 만든 이 사랑스러운 잔에는 위스키 풍미가 한곳에 올라온다. 만인의 언니 효리도 〈서울체크인〉에서 그랬다. “이제 맥주는 술도 아니야.” 사실 요즘 어느 모임을 나가도 화제는 단연 F&B다. 나는 이걸 ‘먹고마시즘’이라고 이름 붙여봤다.

구찌 오스테리아, 루이 비통의 간헐적인 팝업 레스토랑 등 명품 브랜드마저 F&B에 뛰어드는 이유에 대해 바이브컴퍼니 송길영 부사장은 “예전에는 음식점은 공간의 결과였는데, 이젠 모든 공간의 출발점으로 고려될 만큼 사람들에게 ‘깊은 경험’을 선사하는 장소로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별거 없다. 아무리 공간이 가상현실 또는 디지털화돼도 남은 아날로그 방식의 삶은 결국 먹고마시즘에 녹아나게 돼 있다. 그리고 먹고마시즘은 그 식재료를 낳은 ‘산지’ 때문에 여행과도 떼려야 뗄 수 없으니 이래저래 매력적일 수밖에! 이렇게 식감 터지는 요즘, 나를 더 깊은 먹고마시즘에 인도해 주는 셰프 ‘구루’들이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로 만난 이탈리아 셰프인 다리오 체키니, 정관스님, 올 1월에 방영된〈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나온 이탈리아 미슐랭 셰프 3인방이 그들이다. 니콜라, 피에르, 레레, 세 명의 셰프는 포항 보경사에서 한국 스님들을 ‘마담(Madame)’이라 부르고 쫓아다니며 사찰음식의 비법을 전수받고자 열심이었다. 역대 최고 시청률을 달성했다는 이 편에서 3인방이 보여준 모습은 너무 진심이어서 직업 정신을 넘어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먹기 전에 냄새를 먼저 맡고, 음식을 조금씩 맛보며 셰프에 대한 극찬을 하는 3단계 리추얼을 밟는다. 이를 통해 대지, 식재료, 요리사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은 자에 대한 감사함을 전달한다. 찬란한 음식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와 한국답게 공통점도 많았다. 그들은 사찰정식인 발우공양을 할 때 음식을 남기지 않는 전통에서 이탈리아인으로서 ‘스카르페타(Scarpetta)’ 문화를 떠올렸다. 스카르페타는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작은 빵으로 그릇에 남은 마지막 소스까지 싹싹 긁어 먹는 문화인데, 셰프에 대한 경의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 한국의 김장 문화는 8월 말 집집마다 겨울을 날 수 있게 토마토소스를 500여 통 재워놓는 이탈리아의 전통에 비유했다. 이탈리아 셰프들은 김장과 해녀 그리고 간장게장, 씨간장 등 한국에만 있는 음식 문화를 적극적으로 익히며 ‘코리안 소울’을 가감 없이 만끽하고 돌아갔다. 2015년 ‘Jeong Kwan, the Philosopher Chef(정관, 철학자 셰프)’란 제목의 칼럼으로 전남 백양사 주지이자 사찰음식의 선구자 정관스님을 세계적 스타로 만드는 데 기여한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제프 고디니에와 ‘르 베르나댕’의 에리크 리페르 셰프는 정관스님의 요리에서는 ‘양념이 자연’이 요리라고 소개했다. 〈셰프의 테이블〉 정관스님 편에서도 한국 집안의 보물이 되는 몇백 년 된 씨간장이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간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금 결정처럼 굳어버리는데 발효 간장에 새로 담근 간장을 부어 ‘겹장’을 만드는 게 한국 간장의 비법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간직한 이 간장은 모든 음식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생명 줄이다. 앞서 말한 이탈리아 셰프 니콜라는 이를 잠깐 맛보고 위스키를 떠올렸는데, 그 재치에 놀랐다. 실제로 겹장은 위스키의 블렌딩과 같은 원리니까. 고마움의 씨간장이라도 있는 것일까. 감사는 겹치고 겹쳐서 계속 돌아온다. 하늘과 땅, 즉 자연에 대한 감사는 식재료가 되는 음식물에 대한 감사로, 그것을 조리해 주는 셰프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며, 마지막에는 손님에 대한 감사로 블렌딩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 블렌딩되면서 향이 배가된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 삶을 배운다. 〈셰프의 테이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이탈리아 판차노에서 비스트로를 정육점과 함께 운영하는 다리오 체키니 셰프다. 그는 소의 생명에 대한 감사함 때문에 소의 어떤 부분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으로 레스토랑을 세 곳이나 창업했다. 250년간 도축업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소의 눈을 보고 소와 사랑에 빠져 소를 살리는 수의사가 되고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던 상황. 소를 죽이는 도축업자가 된 다리오는 당연히 삶의 무의미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 생전에 함께 일한 고기 선별사가 도축업이란 고기를 써는 게 다가 아니라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최고의 삶을 제공해 줘야 한다. 우리 손으로 숨을 거두면 동물이 남긴 삶을 존중해야지. 넌 삶의 일부를 다루는 거다. 절대 잊어선 안 돼.” 그건 하나의 철학이었다. 2001년 광우병 파동으로 유럽에서 척추뼈가 붙은 쇠고기를 일시적으로 금지하자 다리오는 도축한 소의 시체를 관에 넣고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 후 경매에 부쳤다. 엘턴 존이 이를 모두 사들여 어린이병원에 기부하면서 퍼포먼스는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리오는 소가 우리에게 남긴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소에 대한 존중을 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위로를 얻는다. 토스카나에서는 원래 서로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이 모두 긴 테이블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며 친해진다.

식사 마지막엔 모두 친구가 되어 식당을 나온다. 다리오는 나팔을 불고 단테를 읊으며 토스카나 특유의 흥을 발휘해 소와 쇠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모두 감사함으로 교감시키는 최고의 지휘자가 된다. 한국 고유의 종교 동학에는 이천식천(以天食天), 즉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는 철학이 있다 .모든 존재가 하늘이기에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 행위라는 것이다. 한국 전통과 이탈리아 전통은 또다시 통했다. 요즘 익숙해진 단어 ‘오마카세(お任せ, Omakase)’는 셰프에게 전적으로 요리를 맡긴다는 뜻이다. 계절에 따라 셰프가 가장 좋은 식재료를 사용해 우아하고 예술적인 요리를 제공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고 보니 오마카세는 하늘을 모시는 철학자 셰프들에 대해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일지도 모른다. 요리에 다시 흥미가 솟아오른다. 나도 우리 집 셰프니까 당연할지도. ‘먹고 마시는 일’은 단순한 게 아니라 하나의 철학이다. 그러니 ‘먹고마시즘’은 괜찮은 명명 아닐까?

이원진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10년간 기자로 일했다.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으며,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 믿는 워킹 맘.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