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유연화 좋지만…" 게임업계가 떠는 '공짜 야근' 주범
중견 게임사 개발자 A(33)씨는 출시나 업데이트 등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근무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를 하고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은 기억이 없다. 포괄임금제를 이유로 별도 야근수당 없이 고정임금만 받고 있기 때문이다. A씨는 “업무 특성상 불가피하게 집중적으로 야근이 필요한 경우가 있어 근로시간 유연화 취지는 이해한다”면서도 “포괄임금제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시간제를 개편할 경우 공짜 야근만 많아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근로시간제 개편안에 대한 보완 작업에 들어간 가운데 정보기술(IT)·게임업계 종사자들은 “포괄임금제 금지가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포괄임금제는 법 규정이 아닌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인정된 관행적 제도로, 실제 일한 시간과 무관하게 매달 일정액의 임금을 받는 계약방식이다. 연장근로에 따른 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포괄임금제가 유지되는 한 근로시간 유연화의 취지도 살아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게임업계 종사자 1200명 가운데 56.3%(675명)이 주52시간 근무제 유연화에 긍적적이라고 답했다. 유연화에 부정적이라는 응답은 43.7%(525명)였다.
긍정적이라고 답한 이유에 대해 ‘업무시간을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많은 금전적 보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의 의견이 나왔다. 유연화 취지대로 자율적인 근로시간 조절과 추가 근로에 따른 보상이 가능하다는 기대감에서다. 반면 부정적이라고 답한 응답자들은 ‘총 근무시간이 늘어날 것 같아서’, ‘추가 근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연속근무로 인해 과로하게 될 것 같아서’ 등을 이유로 꼽았다.
엇갈린 반응이 나오는 원인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 있는지 여부에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포괄임금제를 폐지했거나 노동조합이 결성된 대형 게임사에선 근로시간제를 개편해도 부작용 우려가 덜하다. 이미 야근에 따른 보상이 시간 단위로 이뤄지고 있고, 노조를 통해 사업주의 불합리한 개편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포괄임금제가 만연하고 노사 관계가 비대칭적인 중소형 게임사 종사자들이다. 이들에겐 특정주에 장시간 근로를 하더라도 그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콘텐츠진흥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00인 이상 게임사는 포괄임금제가 적용된 비율이 68.0%인 데 반해 50~99인 사업장은 82.7%에 달했다. 보고서는 “종사자들은 근무시간의 증가와 초과근무 보상의 부재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며 “포괄임금제 폐지 및 초과근무와 크런치 모드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나 충분한 휴식시간이 제공될 경우, 주52시간 근무제 유연화를 좀 더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다수 제시됐다”고 밝혔다.
정부도 포괄임금제를 ‘공짜 야근’의 주범으로 인식하고 지난해부터 기획 감독에 나서고 있다. 다만 ‘사후적 오남용 근절’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성우 노무법인 노동과인권 노무사는 “포괄임금의 문제는 노사 모두에게 '아무리 더 일해도 돈을 안 줘도 된다'는 인식이 생겨난다는 점”이라며 “오남용 근절 수준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포괄임금 계약을 금지해야 장시간 근로가 줄어들 수 있다”이라고 말했다.
특히 정부는 근로시간제 개편안을 발표하며 ‘근로시간 기록·관리 방안’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역시 포괄임금제 금지가 함께 이뤄져야 하는 사안이라는 지적이다. 박 노무사는 “판례상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만 체결할 수 있지만, 유럽처럼 근로시간 기록이 의무화될 경우 포괄임금제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제도가 된다”며 “정말 근로시간 산정이 불가능한 업종의 경우에만 예외 조항을 두는 방식으로 보완하면 된다”고 밝혔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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