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화나지만 이제 우짜겠능교" 100살 징용 피해자의 당부

김윤호 2023. 3. 20. 16:1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1923년생 안봉상 옹이 오사카 지역 조선소에서 근무할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독자

"일본을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이제 우짜겠능교."
정부 일제 징용 피해자 배상을 ‘제3자 변제’방식으로 추진키로 한 것에 대해 울산지역 징용 피해자 중 한 명인 안봉상(100) 할아버지가 한 말이다.
그는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의 과거 잘못을) 떠올리면 아직 화가 나지만, 대통령이 국가 발전을 위해 거기(일본과)와 화해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1923년에 태어난 그는 강제동원 당시 힘겨웠던 순간은 또렷이 기억했다. 안 할아버지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1살 때인 1944년 일본으로 갔다. 당시 그는 울산 한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면사무소에서 갑자기 오라고 해서 갔다. 이어 차를 타고 울산역으로 이동한 다음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그러곤 배로 옮겨 탔고, 반나절쯤 지나 배에서 내려보니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한 조선소였다.

"미군 담배 꽁초 주워다피면 몽둥이질"
조선소에는 다다미방이 여러 개 있는 숙소가 있었다. 그곳엔 안 할아버지처럼 한국에서 끌려온 젊은 인부 수천 명이 머물고 있었다. 17명이 좁은 다다미방 하나를 같이 썼다. 2~3명이 한조를 이뤄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배 만드는 일에 투입됐다. 한 달에 크고 작은 군함을 한척씩 만들어내야 했다. 그는 "무엇보다 늘 배가 고팠다"고 기억했다. 조선소 식사는 성인 손 한뼘 크기 나무 도시락에 담겨 나오는 고구마 섞은 밥이나 콩밥, 옥수수 주먹밥뿐이었다. 이렇게 일하고 하루 일당으로 아주 적은 돈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임금으로는 식비나 방값 등을 내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일본인 몽둥이질도 무서웠다. 오사카 조선소 근처에 미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미군 포로가 버린 담배꽁초를 인부들이 몰래 주워다 폈다. 이런 모습이 들키면 일본인 조선소 관리들이 기다란 몽둥이로 때렸다.

"오사카에 원자폭탄 투하 전 전단지 뿌려져"
안 할아버지는 해방이 다가올 때쯤 원자폭탄 투하 위협을 느꼈다. 그는 "어느 날 오사카 전역에 비행기가 오가면서 전단을 뿌렸는데, 그걸 주워서 보니 한글로 '폭탄이 투하되니, 한국 사람은 피해라'는 식의 내용이었다"고 했다. 이에 그는 동료들과 땅굴로 들어가 밤을 지새웠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1923년생 안봉상 옹의 젊은 시절 모습(오른쪽 사진). 왼쪽 사진은 부인과 친척의 모습이라고 한다. 사진 독자 제공

이렇게 1년여간 고초를 겪으면서 일을 했지만, 1945년 해방 후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른 한국인과 목선을 빌려 타고, 후쿠오카·규슈 등을 거쳐 귀국하면서 조금씩 모아 둔 돈은 뱃값 등으로 모두 써버렸다. 제대로 못 먹으며 아끼고 아꼈지만, 귀국길에 배가 고장 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아들 "아버지 어떤 보상도 못 받아"
안 할아버지 아들은 "80여 년 전 아버지가 강제동원 피해를 보셨지만 이와 관련해 어떤 보상도, 보훈 혜택도,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도 받지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정확하진 않지만 오래전 징용 관련 피해보상 소송에 한차례 이름을 올리신 적이 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한다"고 말했다.

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