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둥근 테이블이 필요하다

2023. 3. 17.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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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에게 밀린 이야기가 많다며 말을 쏟아냈다. 분하고 힘든 일이 생겼단다. 나는 “그랬구나…” “어머! 그래?” “그 사람 너무 한다” “넌 할 만큼 했어”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들었다. 친구의 입장을 헤아리고 잠시나마 위안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얘기는 끝인가 싶을 때 다시 시작되고, 진짜 끝인가 싶을 때는 음료 한 모금을 연료로 다시 변주되기를 반복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란 말을 어느 틈에 해야 할지 몰라서 몇십 분을 참았다. 나의 추임새도 진작 사그라졌다.

세 시간 가까이 지나자 친구를 찾는 아이의 전화가 왔고, 그녀는 아이를 챙겨주러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오래 있었음에도 친구가 떠나자 뭔가 ‘휙’ 지나간 것 같고, 친구와 함께 내 시간도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멍하고 피곤했다. 내내 그녀가 말하는 걸 들었지만 사건 요약은 몇 줄이면 족하리라. 결국 ‘서럽고 외롭고 억울해’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친구는 위안이 좀 됐을까. 일상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그 문제 앞에 서게 될 텐데 왜 우리는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머리를 맞대지는 못했을까.

친구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나 역시 똑같이 그랬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 만났음에도 상대방이 아니라 나만 보일 때 내 얘기만 늘어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때로는 나에게 닥친 일에 압도돼서 그랬고 때로는 습관적으로 그랬다. 그런 날엔 집에 와서 자주 후회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시간은 공동의 것인데 왜 나 혼자 사용했을까, 같이 음식을 나눠먹고 비용을 함께 부담하듯이 시간도 소중한 것인데 상대는 관심도 없을 내 얘기로만 가득 채운 것이 미안했다. 물론 아직도 개과천선을 이루지는 못했다.

우리는 매일 입을 열어 말을 하지만 ‘대화’는 드물다. 거창한 주제일 필요는 없다. 시시콜콜한 소재로도 충분히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좋은 대화’를 경험한 기억이 많지 않다. 가족끼리 대화를 많이 하라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가족회의를 열게 된 지인이 있다. 하지만 대화도 아니었고, 회의도 아니었다고 한다. 용돈을 올려 달라는 아이의 요청과 네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 돈을 아껴 써야 한다는 잔소리만 있었다고. 회사에서 상사가 “얘기 좀 합시다” 하고 부르면 훈계만 가득이고 직원이 상사에게 “할 말 있습니다” 하면 퇴사 통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일방적인 말들은 오히려 관계를 단절시킨다.

‘세상을 바꾸는 리더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미국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얘기 중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듣기와 말하기를 둘 다 하는 거죠. 말하는 만큼 듣고, 듣는 만큼 말하는 거요. 그걸 동등하게 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즉석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각자가 목소리를 내고 각자 한마디라도 한다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집단의 일부가 되는 거죠. 그건 공기와 물만큼이나 중요해요.” 당연한 말이 무척 신선하게 들렸다. 누구와 얘기할 때든 내가 말하는 만큼 듣는다면 꼰대를 면하리라.

집에서도 학교나 회사에서도 카페에서도 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곳일까 궁금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듯 방법 또한 알려준다. “원은 자연스러운 형태예요. 원을 그리고 앉은 건 이미 변화를 일으키는 거죠. 10만년 넘게 못한 일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서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 세포가 기억하는 소통 방식이에요. 이게 바로 상대의 감정을 알 수 있는 방식이죠. 결국 우린 서로 연결돼 있지 순위로 나뉘어 있지 않아요.” 회의체를 라운드 테이블이라고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었나 보다.

우리에겐 사소한 얘기들을 공평하게 나눌 둥근 테이블이 필요하다. 거기 둘러앉아 서로 얼굴을 보며 내가 말한 만큼 듣자.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자.

정지연(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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