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거실' 살피는 버라이어티한 사서의 일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최문희 2023. 3. 1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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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여행자가 지은 <도서관은 살아 있다>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고정미 기자]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도서관이다. 공공도서관 어린이실을 밥 먹듯이 다녔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이사 가고 공터에서 죽치고 앉았는데 도서관이 보였다. 내 이름으로 된 대출증을 만들고 로알드 달의 동화책과 뚱딴지 만화책을 빌렸다. 열네 살, 학교도서관에서 생태도감을 빌려 숙제를 하고 처음 시집을 접했다. 전시 관람, 책 구입 등 문화를 누리거나 입시학원을 등록할 형편도 아닌 내게 도서관은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천국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던 보르헤스의 문장을 구체화한다면, 천국을 지키는 자리에 천사, 사서가 있다. 천사는 우아하지 않다. 일부 사람들은 사서가 유유자적 책을 보고 서가를 정리하는 일만 한다고 오해한다. 사서는 하루가 36시간이어도 일일 업무를 소화하기 벅찰 만큼 버라이어티한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다. 도서관 덕후로서 본 바에 따르면 말이다.

자료 수집·정리, 장서 점검 업무는 기본. 사서는 도서관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독서동아리, 독서회, 자원봉사단을 모집·운영한다. 이용자를 위한 문화 기획, 독서캠프, 북큐레이션 등을 실행하고 도서관 빅데이터를 관리한다. 최신 문헌정보를 스크랩하고 다양한 문화사업 지원을 위한 서식을 꾸린다. 정보활용교육, 이용자교육 등 학교도서관 사서교사는 학생을 위한 수업까지 '클리어' 한다. 전국도서관운영평가 준비 등 워낙 많아서 여기까지만 언급하겠다.

우리가 몰랐던 사서의 땀과 고민
 
 책 <도서관은 살아 있다>
ⓒ 마티
"도서관은 공동체의 거실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공공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저자가 <도서관은 살아 있다>에서 내린 도서관의 정의이다. 그는 오랫동안 공동체의 거실을 살피는 일에 골똘하다가 친환경 북 아티스트라는 새로운 꿈에 도전 중이다. 그리고 여전히 도서관 덕후로 살며 스스로를 '도서관 여행자(아래 여행자)'로 명명한다.
이 책은 여행자가 도서관 이용자 혹은 비평가 사이의 시선으로 공공도서관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알리는 이야기이자, 예비 사서들의 견문을 넓히는 인문학 도구이다. 특히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해외 도서관 가이드북'이라 할 만큼 미국에서 한국인 사서로 일하며 마주한 도서관의 오늘을 폭넓게 조망한다.
 
"자전거로 지역 이용자들에게 책을 전달하고, 주차장에서 취약 주민들에게 식료품을 배급하고, 어린이 이용자들에게 드론으로 책을 배달하고, 정보 소외계층에 노트북과 핫스팟을 제공했다. 이렇듯 다채로운 변화의 와중에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공동체가 소통하고 성장하며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공의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이라는 정체성이다."

여행자에 따르면 한 사람이 자립을 위해 들르곤 하는 도서관에서 사서들은 시민들이 어떤 자료들을 찾고자 하는지 기민하게 탐구하는 자들이다. 피임, 집단 괴롭힘, 우울, 자살, 강간, 여드름 치료, 알코올, LGBTQ, 외상 후 스트레스 등 사서에게 문의하기 민감할 수 있는 주제 도서를 꾸준히 업데이트한다.

미국의 공공도서관에서는 청소년 이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위에 언급한 주제의 청구기호를 별도 목록으로 만들어 서가에 붙이거나 눈에 띄는 곳에 비치한다. 이는 이용자가 도서 검색대를 쓰지 않고도 책을 빠르게 찾아 빌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검색대, 무인대출반납기 등 자동화기기가 상용화되어도 사서들이 도서관에 상주해야 하는 이유다.

이용자의 관심과 지지가 엔진이 되는 곳
 
 도서관 사서
ⓒ 고정미
사서는 세상의 기록을 보존하는 사람들이기도 해서 뜻밖의 상황에 맞서는 투쟁가가 되곤 한다. 여행자에 따르면 1989년, 샌프란시스코 중앙도서관 건물이 지진으로 무너지자 관리자는 임시 열람실에 책을 놓을 서가가 없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도서 폐기 작업을 주문한다.

'그해 대출이 된 도서(그린카드)', '지난 2년간 대출이력이 있는 도서(옐로카드)', '레드카드(2년 넘게 대출되지 않은 도서)'로 모든 책이 분류되자 몇몇 사서가 '게릴라 작전'에 돌입한다. 책 창고에 잠입해 레드카드를 그린카드로 바꾸는 책 구출 작전을 펼친 것이다. 덕분에 폐허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서관은 책만 살리지 않는다. 도서관은 성별과 연령, 인종을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2022 IFLA-UNESCO 공공도서관 선언: "공공도서관의 서비스는 나이, 민족, 성별, 종교, 국적, 언어, 사회적 지위 및 기타 특징에 상관없이 모두를 위한 접근의 평등에 기초하여 제공된다"). 오늘날 도서관은 늘어나는 치매 노인 이용자에게 추억 치료와 인지활동 향상을 위한 자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로도 기능한다.
 
"미디어 서가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살펴보시던 단골 할아버지 이용자가 떠오른다. (중략) 데스크에 앉아 있는 사서들과 눈이 마주치면 늘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이 도서관은 비디오테이프가 많아서 좋아." 아마도 치매 예방 차원에서 회상 활동을 하셨던 듯싶다. 자신이 기억하는 옛이야기들을 찾으러 도서관에 오셨던 게 아닐까. VCR 플레이어에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재생버튼을 누르는 행동마저도 할아버지에게는 추억의 한 조각이었을 것이다."
 
여행자가 미국 도서관에서 경험한 것처럼 국내 도서관에서도 디지털 비디오와 큰글자책을 구비하는 등 어르신 이용자를 위한 서비스를 마련하고 있다. 어르신이 어린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도 상시로 연다. 이 모든 프로그램을 사서들이 기획한다. 도서관은 유니버셜 디자인(국적, 장애 유무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및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을 적용하고자 노력하는 실무자들의 땀으로 진보하는 장소다. 더불어 이용자들의 관심과 지지로 존재 이유를 넓히는 곳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도서관을 파괴한다

여행자가 소개하는 도서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서들이 우리 곁에 있다. 어린이 이용자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고 비슷한 장르의 책을 권하는 어린이도서실 사서.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 콘텐츠의 가치를 지키며 노년이 기억을 복원할 수 있도록 돕는 미디어실 사서. 신랄한 도서관 비평가의 시선으로 도서관을 여행하는 사서.

나아가 다음과 같은 사서들도 있다. 풍부한 이야기가 담긴 점자책을 더 많이 들이고자 장서 개발에 힘쓰는 점자도서관 사서. 고민 많은 학생들에게 상담가를 자처하며 책 처방을 내려주는 학교도서관 사서. 고로 도서관은 모든 시민의 말과 생각을 지지하는 이들의 집합체다.

여행자에 따르면 큐레이션은 보살핀다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큐라레(curare)'에서 유래된 단어다. 북큐레이션이 기본 소양인 사서는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이용자에게 필요한 자료를 추천하기에 종국에는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실제로 사서 일을 해온 베테랑들이 공통되게 하는 말이 있다. "사서는 책보다 사람이 좋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여행자가 쓴 이 책에도 이용자의 기쁨을 빈번히 목격하고자 노력한 사서의 감수성이 배어난다. 그는 '당신의 즐겨찾기에 넣어야 할 디지털도서관', '여행 계획에 넣어야 할 도서관' 등 독자에게 양질의 정보를 주고자 밑줄 긋게 만드는 양질의 팁들을 전한다. 읽다 보면 친절한 사서에게 '참고서비스(이용자의 질문과 요청에 응답하는 업무)'를 육성으로 받는 듯하다.

호쾌한 사서의 기록이 반가운 것도 잠시, 국내 공공도서관 정책은 갈수록 퇴보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작은도서관 예산을 삭감했다가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추가경정예산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2022년 기준 전국 학교도서관 가운데 사서·사서교사 전문인력이 배치된 곳은 약 48%에 그친다.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행안부는 지난해 사서교사를 사실상 증원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학원에 가기 어려운 청소년들에게는 도서관이 숨구멍일 수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는 2023년 본예산 심의과정에서 느티나무도서관(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개관한 지 23년째인 느티나무도서관은 2021년 기준 연간 4만 2천4백여 명가량의 시민이 이용했고 사립 공공도서관의 선구 모델로 꼽히는 곳이다. 예산 삭감 반대 서명운동이 잇달아 일어났지만 의회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여행자의 <도서관은 살아 있다>이 더욱 읽혀야 할 이유다.
 
"도서관은 역사 속에서 지배층의 관심과 시민의 후원에 따라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며 진화해왔다. 지혜로운 인간들은 도서관을 건립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도서관을 파괴한다."
 
도서관에서 누구나 읽고, 쓰고, 배우고, 만나고, 듣고, 탐험할 수 있다고 여행자는 힘주어 말한다. 흡사 동사의 세계에서 일하는 '숨가쁜 근로자' 사서의 존재 가치를 이 책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빅데이터 시대에 감시당하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인 도서관에서 사서들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도 생활에 몰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사교육의 홍수에서 이탈한 도서관 덕후들이 마음 놓고 생활의 자원을 빌리러 갈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함께 힘주어 말한다. 그곳은 살아 있으니 파괴를 멈추어라. 도서관에 이용자와 숨은 선수들, 사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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