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은 자란다…‘한국인 1호’ 포수 빅리거 꿈꾸는 엄형찬
한국야구는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현실을 마주했다. 야구 강국이라는 이미지는 무너졌고, 기본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막막한 오늘. 그래도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 지금도 어딘 가에선 한국야구의 희망이 자라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며 더 큰 무대를 향해 도전장을 내민 캔자스시티 로열스 소속의 마이너리거 엄형찬(19)도 숨은 새싹 중 하나다.
엄형찬은 경기상고 소속이던 지난해 7월 캔자스시티와 계약을 발표하며 야구계를 놀라게 했다. 포수 유망주라는 평가는 받았지만, 미국 직행까지는 많은 이들이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8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메리칸 드림은 잘 준비되고 있는지, 어떤 선수로 성장하고 싶은지. 여러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상고를 찾아가 엄형찬을 만났다.
최근 미국 스프링캠프 출국을 앞두고 막바지 담금질이 한창이던 엄형찬은 “졸업식을 하고 이제 정말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아쉬움이 생긴다. 학창시절이 그리울 것 같다”면서 멋쩍게 웃었다. 이어 “멀게만 느껴졌던 미국 생활도 현실로 다가왔다. 언제 새 시즌을 맞이할까 했는데 벌써 스프링캠프가 시작했다.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하다”면서 지금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엄형찬은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서프라이즈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서프라이즈는 캔자스시티 메이저리거와 마이너리거의 합동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곳이다. 구단의 새 일원인 된 엄형찬에게도 당연히 초대장이 주어졌고, 현재 새로운 동료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엄형찬은 “이번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신경 썼다. 지난해 가을 참가한 미국 교육리그에서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다”면서 “확실히 서양 선수들의 체격이 뛰어나더라. 어떻게든 자리를 잡기 위해선 먼저 몸이라도 불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육을 키웠다. 체중도 83㎏에서 87㎏이 됐다. 주위에서 내 달라진 몸을 보고 가끔 놀라곤 한다”고 설명했다.
우투우타 포수 엄형찬은 어릴 적부터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웠다. 이를 위해 일찌감치 영어 공부를 하면서 철저히 밑바탕을 준비했다. 따로 학원은 다니지 않았지만, TV로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챙겨보며 언어를 익혔다. 최근에는 유튜브도 좋은 과외선생님이 됐다. 지난해 교육리그에서 큰 문제없이 동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엄형찬의 부자(父子) 스토리도 화제를 모았다. 롤모델이자 아버지인 엄종수(50) 경기상고 배터리코치와의 ‘평행이론’이다. 같은 포수 출신인 엄 코치는 1996년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다. 그러나 투수 전향 등의 문제로 방황하다가 2년 뒤 방출됐다. 이후 신일중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하던 엄 코치. 그런데 여기에서 뜻밖의 기회가 생겼다.
이날 엄형찬과 함께 만난 엄 코치는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면서 어깨 상태가 좋아졌다. 연습 삼아 던진 공이 시속 140㎞대까지 나왔다. 이를 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스카우트가 마이너리그 계약을 제안해 2000년 미국으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엄 코치의 도전은 이듬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아들이 대를 이어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야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MLB닷컴은 “엄종수와 엄형찬은 한국 최초로 부자 마이너리거가 됐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엄 코치는 “아무래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식을 미국으로 혼자 보내려고 하니까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지난해 교육리그를 무사히 다녀온 것을 보면서 기특함도 든다”고 아빠 미소를 지었다.
한국야구는 그동안 박찬호(50)를 비롯해 김병현(44)과 최희섭(44), 추신수(41), 류현진(36), 최지만(32), 김하성(28) 등 여러 메이저리거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아직 포수 마스크를 쓰고 빅리그 무대를 밟은 이는 없다. 엄형찬이 수년 내로 캔자스시티 안방을 책임진다면, 한국야구 역사상 최초의 포수 빅리거가 탄생하는 셈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엄형찬은 “그 점이 미국행에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다. 투수와 야수 메이저리거는 많은 데 왜 포수 빅리거는 없을까 혼자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면서 “물론 1군까지 올라가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쉽지는 않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꿈을 향해 달려가 꼭 1호 한국인 포수 메이저리거가 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엄형찬이라는 이름은 곧 모교의 자랑이기도 하다. 이날 찾은 경기상고 곳곳에는 엄형찬의 얼굴이 들어간 플래카드와 홍보 포스터가 휘날리고 있었다. 엄형찬은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코로나19가 들이닥쳤다. 그래서 대면 수업도 많이 듣지 못했고,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적었다. 아쉬움이 컸는데 어느 날 선생님들께서 학교 홍보대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셨다. 부끄럽기는 했어도 훗날 추억이 될 것 같아서 흔쾌히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중에는 메이저리거가 돼 다시 홍보대사를 맡고 싶다”고 야무진 각오를 이야기했다.
고봉준 기자 ko.b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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