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들의 연이은 국가대표 은퇴 선언, 그 아쉬움에 관하여
[이준목 기자]
▲ 김광현 국가대표 은퇴 발표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조기 탈락한 한국 야구대표팀 투수 김광현이 14일 오후 자신의 SNS에 국가대표 은퇴 의사를 밝혔다. 사진은 이날 오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귀국한 김광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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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3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한국야구대표팀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3월 14일 대표팀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귀국한 가운데, 주축 선수였던 김광현과 김현수는 잇달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WBC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김현수는 13일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중국전을 마치고 인터뷰에서 마지막을 고했다. 김현수는 이미 WBC 엔트리에 발탁된 이후부터 이번 대회가 마지막 태극마크임을 암시해왔기에 어느 정도 예상된 결정이었다. 김현수는 "저보다 좋은 선수들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저는 이제 나이도 있고, 젊은 선수들이 잘할 거라 생각한다. 내려올 때가 된 것같다. 다만 마지막 국제대회 성적이 좋지 않아 아쉽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김광현은 지난 14일 귀국 후 개인 SNS 계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은퇴 의사를 밝혔다. 김광현은 "저에게 국가대표는 꿈이고 자부심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를 제창하던 그 모습은 평생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라고 회상하며 "이제는 후배들에게 넘겨줘야 할 것 같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너무나 아쉽고 분통하다. 오늘부터는 랜더스의 투수 김광현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다시 한번 죄송하고 감사하다. 국가대표 투수 김광현 올림"이라는 글을 남겼다.
김광현과 김현수의 국가대표 은퇴 선언은 한국야구에 '황금세대의 퇴장'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선수는 한국야구대표팀의 최고 황금기로 불리우는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의 주역이었다. 당시 20대 초반의 대표팀 막내급이었던 두 선수는 한일전 등 중요한 순간마다 맹활약하며 당당히 우승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이후로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간판스타로 올라섰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오랜 시간 꾸준히 활약했다.
공식적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이야기한 선수는 김현수와 김광현 둘 뿐이지만, 이번 대표팀에 발탁됐던 선수 가운데 박병호, 양의지, 양현종, 최정 등 1980년대생 고참 선수들은 대부분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국제 대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아시안게임과 내년 프리미어12 등이 있지만 젊은 선수들 위주로 엔트리를 꾸릴 것이 유력하고, 다음 WBC가 열리는 2026년은 3년 후이기에 베테랑 선수들은 은퇴하거나 기량이 노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타이밍'이다. 하필이면 최근 한국야구의 국제경쟁력이 암흑기에 접어들었고, 이들의 뒤를 이을 다음 세대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마지막 국제대회마저 최악의 성과를 남기고 박수받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떠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지난 2020 도쿄올림픽 노메달에 이어 WBC 1라운드 탈락으로 야구대표팀을 바라보는 여론의 분위기가 싸늘한 게 사실이다. 한국야구의 경쟁력 하락이나 선수들의 실망스러운 플레이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를 대표하는 책임감을 바탕으로 보여준 헌신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김광현과 김현수는 이번 대표팀에서 최고참급이자 가장 국가대표 경력이 풍부한 선수들이다. 그만큼 한국대표팀이 겪었던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들도 모두 경험해봤다. 그 이야기는 바로, 이들이 누구보다 많이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헌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부상이나 해외진출 등으로 인하여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표팀에서 뛸 수 있는 상황에서는 대표팀 소집을 거부한 적이 없다. 실제로 이들은 국제대회에서도 한국이 가장 믿고 내보낼 수 있는 확실한 카드들이었다.
막내급이었던 시절에는 든든한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그라운드에서 자기 몫만 충실히 하면 됐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베테랑이 되었을 때는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다. 노력한 만큼 따라주지 않는 팀성적에, 고참선수로서 앞장서서 화살을 맞아야 하는 경우도 잦았기에 더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김광현은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이번 WBC에 또다시 소집된 것을 두고 추신수로부터 "언제까지 김광현-양현종이냐"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대표팀의 세대교체 실패를 비판하는 이야기였지만, 그만큼 오랜 세월 최고의 기량을 유지해오며 국가대표에도 헌신해왔던 김광현에겐 상처가 될 수 있었다.
김현수는 이번 대표팀의 주장이었다. 그는 WBC 대회 내내 야구는 물론이고 대표팀 안팎을 뒤흔드는 '외풍'과도 싸워야 했다. 일부 선배 야구인들의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할 말을 하는 것은 항상 김현수의 몫이었다. 누군가는 김현수가 말을 아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지만, 10여 년 넘게 대표팀 생활을 이어오며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현수이기에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반쯤은 '등 떠밀려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에 몰린 것은 아닌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야구에서 선수가 먼저 국가대표 은퇴를 거론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축구처럼 국가대항전이 많지 않은 데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이 기준점이 될 만한 권위있는 대회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가 스스로 더 이상 국가대표에서 뛰는 게 어렵다고 느낀다면 스스로 은퇴를 선언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2009년 당시 36세의 박찬호는 2회 WBC를 앞두고 김인식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합류 요청을 받았으나, 정중히 고사하며 아예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메이저리그에서의 불안한 입지 때문에 시즌 개막 전에 열리는 국제대회를 병행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박찬호는 기자회견을 열고 태극마크를 내려놓아야 했던 이유를 진솔하게 해명했다. 당시 박찬호는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으로 화제가 됐고, 팬들도 그의 선택을 존중하며 국가대표팀 고사와 은퇴를 비판하는 여론은 없었다.
그런데 김광현이나 김현수의 은퇴 선언이 주는 아쉬움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국가대표의 자격은 나이나 세대교체가 아닌,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번 WBC에서 젊은 선수들로 세대교체에 가장 성공했다는 일본만 해도 다르빗슈(36세)같은 노장들이 있엇고, 세계에서 가장 선수층이 두터운 야구 최강국 미국에도 애덤 웨인라이트(41세)-메릴 켈리(35세) –라이언 프레슬리(35세)-브룩스 레일리(35세) 등이 있으며, 심지어 도미니카 대표팀의 단장 겸 선수로 출전한 넬슨 크루즈는 무려 43세였다. 한국도 이승엽이 2013년 WBC에서 당시 38세의 나이로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던 사례가 있다. 모두 지금의 김광현-김현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선수들이었다.
만일 베테랑이 나이가 들어 기량이 쇠퇴하고 앞으로 대표팀에 뽑히지 않으면 그게 바로 국가대표 은퇴다. 하지만 김광현-김현수-양의지같은 선들은 지금 현재도 KBO리그 내에서 젊은 후배들을 제치고 '이름값이 아닌 실력'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다시 대표팀에도 발탁된 것이다.
만일 이들이 2~3년 뒤에도 소속팀에서 자기관리를 잘해서 훌륭한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태극마크를 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게 더 정상이 아닐까. 그런데 유독 우리 나라만 오랫동안 대표팀에 기여한 베테랑 선수들의 노력과 헌신을 존중해주지는 못할망정,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이 선수들이냐'라는 식으로 마치 '고인 물' 취급하는 풍토는 뭔가 잘못됐다.
이들이 대표팀에 은퇴한다고 해서 세대교체가 억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성적에 대한 부담과 세대교체라는 암묵적인 강박이, 멀쩡히 아직 기량을 유지하고 있는 베테랑들까지 나이가 차면 국가대표 은퇴를 당연시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할 부분이다.
믈론 김광현과 김현수는 언제든 충분히 박수받으며 떠날 자격이 있는 '레전드'들이다. WBC에서의 부진은 팀으로서 아프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국제대회 한두 번의 결과로 인하여 10년이 넘도록 태극마크를 위하여 헌신해온 선수 개개인들의 모든 시간과 노력까지 폄하 당해서는 안된다.
앞으로 축구처럼 A매치에서 오랫동안 기여한 선수들에게는 협회 차원에서 국가대표 은퇴식같은 이벤트를 마련해주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또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등 떠밀려 떠나는 모양새가 아닌, 선수생활이 끝날 때까지 국가대표에 대한 목표의식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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