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가 만든 고백

전혜진 2023. 3. 16.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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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 로 다시 화두가 된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의 고백은 현실일까.
「 고백은 고백으로만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
“내 소원이 뭔 줄 아니? 나도 언젠가는 너의 이름을 잊고, 너의 얼굴을 잊고, 어디선가 널 다시 만났을 때 ‘누구더라?’ 제발 너를 기억조차 못하게.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하지 않니? 내 세상이 온통 너라는 게?” 화제 속 파트2 방영을 앞둔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주인공이자 학교폭력(이하 학폭) 피해자 문동 은(송혜교)의 대사다. 학폭을 다룬 콘텐츠 중 이 드라마가 유독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폭력 이후 의 삶, 그 고통스러운 시간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위 대사는 현실이다. 20년이 흘러도 피해자의 세상은 온 통 가해자가 남긴 상흔투성이고, 용서마저 쉽지 않 다.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청 차트 1위를 점유한 〈더 글로리〉의 열기는 각국, 각 세대의 동은이들에게도 닿아 있는 모양. 태국에서는 ‘타이 더 글로리(Thai The Glory)’라는 이름의 학폭 고발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유튜버 곽튜브, 배우 서신애와 박하선, 뮤지션 전소미와 양요섭 등이 피해 사실을 고백해 힘을 더하며, K팝 스타들을 향한 고발도 화수분처럼 터져나온 다. 브런치 같은 글쓰기 플랫폼을 통해 혹은 여섯 명 의 성인 여성이 저마다 학폭 피해 경험을 고백한 〈여섯 개의 폭력〉 등 책에서도 피해자들은 내면에 숨겨 둔 저마다의 동은을 불러 모은다.

사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학폭이란 개념은 희미했다. 당시 겪거나 목격했던 일이 명백한 폭력이었음을 이제야 자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결코 늦지 않은 고백, 자신과 누군가를 위해 용기 내 꺼내 보인 단단한 마음은 청소년 들에게 작은 불꽃을 틔운다. 비록 현실은 더 나아지지 않을지언정 학폭에 관한 오개념이 수정되거나, 학폭 문제에 무관심하던 이들도 한 번쯤 주변과 자신을 뒤돌아보는 소소한 변화는 반갑기만 하다. 청소년 학폭 상담 창구이자 NGO 푸른나무재단 김 석민 상담팀장은 “〈더 글로리〉뿐 아니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학폭으로 투신 사망한 아들을 위해 재단을 설립한 김종기 이사가 출연했을 때만 해도 큰 파급력을 느꼈다. 주변의 도움을 받고 싶거나, 누군 가에게는 꼭 털어놓고 싶어서 혹은 스스로 용기 내보 고 싶다는 작은 의지에서 시작된 고백들”이라고 변화 를 설명한다. 꼭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의 고백도 이 어지고, 피해 시점도 수십 년 전까지 폭이 넓다. 한국 청소년정책연구원 학교폭력예방교육지원센터 김예 원 전문연구원 또한 최근 업무 연락을 주고받는 교육 부와 교육청 학교폭력예방교육 업무 담당자들이 바 빠졌다고 전한다. “학폭 발생 시 피해 학생들이 잘 회 복하고 힘을 얻어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최우선 과제 다. 그런 관점에서 미디어의 유명인들이 피해 경험을 나누고, 그로 인해 위로받는 일련의 과정은 피해 학 생이 ‘내 잘못이 아니구나’ ‘나만 겪는 게 아니구나’라 는 사실을 깨닫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상처를 회복하 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경험자인 서신애는 한 인터뷰를 통해 “지금도 학폭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다면 용기 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 나는 그러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괜찮아 질 거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게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며 적극 고백할 것을 권유한다. 이 관심이 학폭에 대한 사회의 적극적 지원과 참여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 청소년에겐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과정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게 느껴진다. 신고율은 매해 상승 중이지만 신고 시 진정 어린 사과 를 받고 피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보다는 신고자에게 갈 불이익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상황이라는 김 연구원의 말처럼 말이다. 중 · 고등학생은 초 등학생보다 신고를 더 힘들어하며, 미신고 사유도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야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더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 등이다. 신고자에 대한 신변 보호는 현실적으로 꽤 어려운 측면이 있고, 학 교폭력심의위원회가 열려도 신고자 신상에만 이목 이 쏠리는 경우가 태반. 확실한 처벌이 가능한 경찰 청 신고센터에 신고하는 경우에도 확인 과정에서 신 상 정보가 공개되거나 학적부 기록에 남는 것에 대한 우려가 고통을 뛰어넘는다. “ ‘동은이가 아니었으면 혜정이 네가 됐을지 모른다’는 〈더 글로리〉의 대사처 럼 학폭 피해자는 ‘사소한 상황적 틈’에 따라 누구나 될 수 있고, 여차하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김 연구원은 강조 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전할지 방법론적 인식조차 없는 청소년이 대다수라는 김 팀장은 “피해 학생 대부 분은 신고를 통해 가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을 수 있을지 가장 먼저 궁금해하고, 실질적인 화해와 학교 적응을 원하는데, 보호자 대부분은 가해 학생 처벌과 선도 등 사안 처리를 우선시한다”고도 덧붙였다. 어른들의 인식과 태도도 한몫한다는 것.

물론 가해자가 마땅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디어의 여파로 교육적 해결보다 사법적 관점만 강조될까봐 우려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가해 학생이 폭력을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게 사안 처리 이후 가 해 학생이 학교나 사회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궁극적인 예방책”이라는 김 연구원 의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현실의 동은에게는 ‘함께 칼춤을 춰줄 망나니’나 파파라치 역할을 해줄 파트너도 없을 것이다. 사적 복 수는 판타지이고, 어쩌면 일부 피해자들은 그의 복 수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단 통쾌하게 대응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거나 ‘이 정도로 학폭이라고?’ 하 는 타인의 잣대에 짓눌려 속시원하게 누군가를 탓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결국 전문가들이 학폭 문제는 사전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김 팀장은 “항상 모든 상담의 마지막에는 ‘그래서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받는다. 회 복 지원을 정책적으로 잘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만, 예방교육은 필수 전제 조건이다. 분기별로 예방 교육을 실시하는 법안이 있어도 실질적으로 해당 교육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청소년이 태반이며, 어떤 행동이 폭력인지 아닌지 구분할 개념조차 없다”고 전했다.

실제 피해 경험 또한 저연령화되는 추세인 가운 데 더 어릴 때부터 확실한 교육이 동반돼야 학폭의 개념에 관한 마땅한 인식을 가질 뿐 아니라 피해 경험 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대처할 수 있다. 김 연구원 또 한 앞으로 학생들이 직접 학폭을 고민하고, 예방하 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망 한다. “기성세대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신종 학폭 추 세나 교묘하게 사각지대에서 이뤄지는 폭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주체가 돼 폭력을 예방하고, 해결 방안을 제안하고, 실천해 나가는 문화가 필요하다. 어른들은 그에 따른 지원과 보호를 충분히 해주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현재 학교폭력예방센터는 동아리나 학생회를 통해 학교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고 체험하는 학생 중심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다. “국어, 사회와 같은 교과 수업시간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프로그램들은 갈등 해 결과 감정 조절, 공감능력 같은 사회정서적 역량을 길러준다.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수 학습 지도안, 적용 우수 사례, 학폭 추세 대응 교육 자료 등의 발 빠른 보급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뜨거운 관심에 힘입어 학폭 예방 연수 참여 시 교사 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 제도 정책을 만들거나, 카카오톡이나 틱톡 등 청소년과 뗄 수 없는 SNS를 운영하는 민간 기업들의 적극적 협조 또한 기대한다”는 김 연구원은 ‘학폭 예방 및 사안 처리’의 업무 지원 인력 인 속기사와 변호사, 상담사, 장학사, 주무관의 증원 또한 관련 업무자들의 공통된 소원일 것이란 바람도 내비쳤다. 의지를 갖고 문제 해결에 임하는 어른도 많지만, 과중한 업무량이나 자극적으로 쏟아지는 언론 보도를 의식하느라 개별 사례에 집중하기 어렵고 부 담이 크다는 의견도 일리 있다. 극중 동은은 “피해자 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 중 어느 쪽이 더 견고 할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결국 그에 대한 답은 뻔 하더라도 우리 사회 모두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 고백은 고백으로만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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