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후벼파면 도움 되겠나"…일본 국빈방문 노무현의 말
“과거사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만, 답변은 제 가슴 속에 묻어두겠습니다.”
2003년 6월 일본을 국빈방문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당시 일본 TBS ‘한국 대통령과의 솔직하게 대화’에 출연했던 노 전 대통령은 한 일본 시청자의 과거사 관련 질문에 “모든 문제를 다 후벼 파서 감정적 대립 관계로 끌고 가는 것이 우리 후손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대선 후보시절 반미·반일 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노 전 대통령은 국빈방문 기간 특유의 솔직 담백한 화법과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 발언으로 일본 국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16~17일 일본 방문을 앞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의 2003년 일본 국빈방문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에선 제3자 변제안에 기초한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이 “굴욕적”이라며 윤 대통령에게 연일 친일 프레임을 씌워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민주당의 뿌리로 여겨지는 노 전 대통령이 일본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던 과거를 언급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독도 문제 등으로 노무현 정부 중·후반 한·일 관계가 험로로 치달으며 잊힌 측면도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은 그 어떤 대통령보다 일본에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던 대통령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6월 6일부터 9일까지 3박 4일의 일정으로 일본을 국빈방문했다. 도착 첫날엔 일본 일왕 내외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 둘째 날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 뒤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양국 정상의 성명에서 과거사의 비중은 “1998년 10월 발표된 한·일 공동 선언 정신에 따라 역사를 직시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도로만 언급됐다. 그 외의 내용은 안보와 경제 협력 등 미래에 초점이 맞춰졌다.
양국 정상은 북한 핵무기에 대한 불가역적 폐기와 외교적 해결 노력을 함께 촉구했다. 국민 간 사증 면제와 서울과 도쿄(東京)를 잇는 가장 빠른 하늘길인 김포·하네다(羽田) 노선도 이때를 계기로 추진됐다. 한·일 일일생활권의 시작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일본 TBS의 ‘한국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한·일 관계에 대한 생각을 진솔하게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질문에 “취임식을 앞두고 고이즈미 총리를 초청하려 했는데 신사 참배를 했다”며 “초청을 취소해버리면 한·일관계는 다시 얼어붙어 버린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손발을 맞추어 나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방송에선 우호 관계를 심화시키고 싶은 1순위 국가로 일본을 꼽았다. 일본 의회 연설에서도 노 전 대통령은 “양국 국민이 과거사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럼없이 교류하며 서로 돕는 시대가 하루속히 열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협력을 촉구했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일본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며 국내에선 친일 역풍이 불 정도였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준비 중인 대통령실도 노 전 대통령의 당시 방일 사례를 살펴보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진보와 보수 정부를 가리지 않고 도움될 사례는 모두 참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맺으며 발표한 대국민 담화도 집중 검토 중이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라며 양국 협력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열어젖힌 한·일 관계의 문을 새롭게 업그레이드 해야 할 시기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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