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이 본질이나니…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가라 ”

손영옥 2023. 3. 14.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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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작가 생활 55년, 두 번째 상업갤러리 전시회 여는 성능경
성능경 작가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백아트 갤러리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던 중 미소를 짓고 있다. 권현구 기자


지난 2월 말 서울 종로구 삼청동 앞 백아트 갤러리. 오후 5시가 되자 이 신생 갤러리가 사람들로 붐볐다.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로 밖이 가득 차 갤러리 내부가 안보일 정도였다. 안에서는 원로 미술가 성능경(79)씨가 개인전 개막식 겸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그가 꽃무늬 양산을 쓰고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자 좌중은 술렁였다. 그는 일침을 놓듯 큰소리로 외쳤다. “젊은 몸만 몸이냐, 늙은 몸도 몸이다.” 훌라후프 돌리기에 이어 새총으로 탁구공 쏘기 퍼포먼스를 하며 탁구공에 적힌 문구를 하나하나 외쳤다. 그중 가장 귀에 박힌 것은 이거였다.

“알맹이는 물러가고 껍데기만 남았거라. 스타일이 본질이나니. 스타일이 이 세상을 지배하나니.”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패러디해 미술에서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작가의 미술철학이 궁금했다. 며칠 지나 이달 6일 갤러리에서 다시 작가를 만나 인터뷰했다.

성능경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공식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지만 지난 55년간 상업갤러리 전시는 이번이 두 번째다. 미술관을 합쳐도 개인전은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작품이 팔린 것은 2009년이 처음이었다. 그랬던 그가 올해에만 백아트를 시작으로 5차례 전시를 한다. 5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70년대 실험미술 작가를 조명하는 기획전에 참여한다. 이 전시는 9월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내년 봄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상업갤러리에서는 8월에 갤러리현대에 이어 9월 뉴욕 리만머핀갤러리에서 전시한다. 쏟아지는 러브콜에 작가도 당황스러웠다. 리만머핀갤러리 이름을 ‘리만 브러더스’라고 잘못 발음할 정도로 상업갤러리와는 담을 쌓고 지낸 그였기 때문이다.

그가 밝힌 “나는 비영리, 비상업 작가”라는 말이 맞았다. 그가 한 미술 작업이라곤 작품이 팔리는 회화나 조각이 아니라 신문 읽기/오리기, 돈 세기, 스트레칭하기, 사탕·콜라·케이크·떡먹기, 이빨 쑤시기, 훌라후프하기 등 우리가 늘 하는 일상적인 행위를 사용한 퍼포먼스였다.

작가는 “나는 일상의 단편들을 예술에 차용함으로써 삶과 예술의 관계를 교착시키고 혼돈을 유발하고자 한다”라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설명했다. 이번 개인전 제목도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듯…성능경의 예술행위’다.

성능경은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군복무 이후 1973년부터 이건용 등과 함께 전위미술단체인 ST(Space&Time)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ST전에서 그날의 신문 기사를 오려 기사는 청색 아크릴 상자에, 나머지 부분은 흰색 아크릴 상자에 넣는 작업을 선보였다. 두 달여 전시 기간 중 매일 전시장에 가서 신문을 오리고 나머지 신문은 덧붙이는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55년여간 170여 차례 퍼포먼스를 했다.

작가는 “공연 등 여러 예술 형태 중 미술에만 물질성이 있어 재산 가치를 지닌다”면서 “미술에서 그 물질성을 제거함으로써 ‘미술이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는 게 바로 개념미술”이라고 설명했다.

성능경 작가가 지난 2월 백아트 갤러리에서 수축과 팽창 시리즈 도중 작품을 은박지로 가렸다가 개막식이 끝나고 걷어내는 퍼포먼스를 한 장면.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ST그룹을 한 이건용 작가의 경우도 ‘달팽이 걸음’ 등 퍼포먼스를 했다. 당시 청년작가였던 그들은 어떻게 개념미술을 하게 됐을까. 성능경은 이 질문에 대해 조셉 코수스의 에세이를 번역해 1974년 ST전시회 때 회원들이 강독했다고 회고했다. 코수스는 실제 의자, 의자 사진, 의자라라는 단어의 뜻을 적은 종이를 함께 전시한 ‘한 개이면서 세 개인 의자’(1965년)를 발표하며 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개념 미술의 아이콘이다.

성능경을 대표하는 신문 오리기 작업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선보였던 시기는 박정희 군부 정권 하라 시절이 엄혹했다. “혹시라도 중앙정보부에서 누군가 조사나왔을까 조마조마했다”고 회고하면서 “잡혀가지 않을 정도의 작업만 했다”고 농을 했다. 그러면서 “74년으로 돌아가 ‘우리가 받아들인 게 개념미술이냐?’라고 다시 물으면 그 영향은 숨길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저는 서구가 아니라 우리나라 현실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우리의 예술은 자생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미술시장에서는 유독 유화를 선호한다. 그는 평생 작가로 살아오면서 팔리지 않는 미술을 해왔다. 그렇다고 대학교수로 지내지 않았다. 계원예고에서 29년간 강사로 재직한 게 돈벌이의 전부다.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는 “강사 월급은 술값 대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36세에 장가 가 아내가 저를 먹여살린 거죠.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변명하자면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모두 여자를 먹여 살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여자가 남자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우도 있어야지요.”

성능경의 개념미술과 행위예술은 70∼80년대 설자리가 없었다. 70년대는 단색화(단색의 추상화)가 주류미술이 되었고, 80년대에는 추상화에 반대하는 민중미술이 떠올랐다. 그는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그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82∼84년 3년은 자의반 타의반 공백기로 남는다”고 했다. “민중미술에서 볼 때 제 작품은 구호가 부족했습니다. 민중미술은 민중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없습니다. 제가 제일 문제 삼는 것은 미술 그 자체입니다. 저는 유화는 미술의 형식으로서 끝났다고 봅니다. 유화는 (개념미술이 걷어내려 한) 물질로 뒤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민중미술로 뛰어들 수 없는 이유였지요.”

그는 “우리가 개념미술을 수용하고 보니 민중미술은 방법론이 미약했다. 예술에서는 내용을 드러내는 방법, 즉 형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알맹이는 물렀거라, 껍데기는 남았거라. 스타일이 본질이나니’ 같은 제 어록이 90년대 생산된 것”이라고 했다.

성 작가가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모습. 성 작가는 작품이 팔리는 회화나 조각이 아닌 신문 읽기, 돈 세기, 훌라후프하기 등 우리가 늘 하는 일상적인 행위를 사용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흑백 갤러리 제공


성능경은 90년대 들어 이빨 쑤시기, 훌라후프 돌리기, 줄넘기, 부채질하기, 새총으로 탁구공 쏘기 등 여러 퍼포먼스를 연속으로 했다. 일종의 체인 퍼포먼스를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오줌 누기/마시기, 자위행위 하기 등 원색적인 퍼포먼스도했다. 어찌됐든 각 퍼포먼스를 모듈처럼 사용해 엮었다. ‘부채질하기+훌라후프 돌리기’ 등 어떻게 엮는가는 상황 따라 다르다. 작가는 “예술가가 평생 하는 작업의 목적이 자신의 형식을 창출하는 것이라면 저는 모듈 퍼포먼스로 나만의 형식을 창출한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성능경의 개념미술은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서구에서 유입돼 유행하며 이영철, 이영욱 등 일군의 후배 평론가들로부터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여전히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지난 10년간은 1년에 한두점씩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며 집안에 체면치레는 했다”며 웃었다.

최근에 그에게로 향하는 스포트라이트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구겐하임 전시 효과 덕분이 아니겠느냐. 거기서 일단 나를 걸러주니까 주목받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도 나왔다. 작가는 ‘그날그날 영어’ 등 매일 일기를 쓰듯 하는 수행적인 작업을 즐긴다. 지난 코로나 3년 동안은 매일 아침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본 뒤 사용한 휴지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앱으로 그린다. 일명 ‘밑작업’이다.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 그림을 시도하는 원로 작가는 국내외에 더러 있지만 성능경의 작업이 제일 유머러스한 것 같다. 전시는 4월30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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