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유역 '잃어버린 왕국'의 금동관, 누구의 것일까
[임영열 기자]
▲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나주 신촌리 금동관’ 1917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고분군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금동관이다. 금동관은 구리와 금을 섞거나 구리 위에 금을 입혀서 만든 관이다 |
ⓒ 문화재청 |
며칠 동안 면사무소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흩어져 있는 30여 기의 고분군을 조사하던 야쓰이 일행은 높은 곳에 위치한 고분 한 곳을 발굴 대상으로 선택했다. 그곳에 올라 바라보면 주변의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좋은 곳에 최고 권력자의 무덤이 조성됐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 나주 반남고분군과 함께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나주 신촌리 고분군 |
ⓒ 문화재청 |
▲ 발굴당시 신촌리 9호분의 모습. 원형으로 복원했지만, 실제로는 방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
ⓒ 문화재청 |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며칠간 내린 눈이 고분 주위에 쌓였지만 야쓰이는 조선인 인부들을 재촉하여 을(乙)관의 벌어진 틈새를 이용하여 윗부분을 들어냈다.
한반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커다란 '옹관(甕棺)'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고 권력의 상징인 '금동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금동관뿐만 아니었다. 금동신발, 봉황무늬 큰칼, 세잎무늬 큰칼, 크고 작은 토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눈앞에 줄줄이 펼쳐졌다.
▲ 발견당시 신촌리 9호분 을관의 내부 모습. 시신은 이미 산화 됐고, 금동관과 환두대도 각종 구슬, 토기 등이 보인다 |
ⓒ 국립중앙박물관 |
잃어버린 왕국 마한의 상징 '옹관과 금동관'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된 금동관은 고고학 역사상 한반도에서 최초로 세상에 나온 금동관이다. 금동관은 구리와 금을 섞거나 구리 위에 금을 입혀서 만든 관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20년 경남 양산 부부총에서 금동모관과 대관이 출토되었고, 1921년에 경주 금관총에서 순금으로 만든 신라의 금관이 세상에 나왔다.
1917년 12월 23일.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비운의 금동관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사단장이었던 야쓰이 보고서 때문이었다. 2년 뒤에 나온 그의 보고서는 달랑 한 장. 너무나 간략했다.
▲ 발굴당시 옹관의 모습. 옹관(甕棺)’은 흙으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붙여서 만든 관이다 |
ⓒ 국립중앙박물관 |
그 이듬해 1918년 2차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도 자세한 보고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보고서로 인하여 고분은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귀중한 유물이 나왔음에도 아무런 보호조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서에 나와 있는 대로 "이 고분들은 그 장법과 유물들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왜인(倭人)'들일 것이다"라는 구절에 힌트가 있다. 일제는 왜(倭)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했다'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금동신발 |
ⓒ 국립중앙박물관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금동관이 나온 나주 반남고분군은 묘제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대형 옹관을 사용했다. 지하에 나무관을 매장하는 무덤과는 달리 평평한 평지 위에 성토를 한 다음 3m가 넘고 무게도 500kg가 넘는 커다란 옹관을 안치한 후 봉분을 쌓았다. '옹관(甕棺)'은 흙으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붙여서 만든 관이다.
▲ 분구묘 형태의 신촌리 9호분. 평지에 성토를 한 다음 무덤을 조성한 ‘아파트형 공동무덤’이다 |
ⓒ 국립중앙박물관 |
신촌리 9호분도 옹관 11기가 함께 묻혀 있는 길이 33m 높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방형의 분구묘 형태로 조성됐음이 확인됐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백제 무령 왕릉보다 훨씬 크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백제의 '석실고분'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국립나주박물관에 재현했던 옹관의 모습 |
ⓒ 김경남 |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이런 독특한 형태의 옹관고분 묘제는 6세기 중엽 이후 백제식 석실고분으로 완전히 대체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크게 유행한다. 그렇다면 화려한 금동관에 금동신발 신고 각종 장신구로 치장하고 큰 칼을 옆에 둔 채로 옹관에 누워 잠들어 있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왜인의 수장'일까.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거대한 문명은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하여 커다란 강줄기를 따라 발생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인류가 번성하였고 강은 곧 국가 형성의 기반이 됐다. 전라남도 담양의 용추골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한반도 서남부 광주·나주·영암의 곡창지대를 흥건히 적시며 서해로 흘러간다.
▲ 금동관 정면 |
ⓒ 문화재청 |
▲ 금동관 뒷면 |
ⓒ 문화재청 |
고대국가 마한. 어떤 나라일까. 아쉽게도 우리의 역사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의 왕국이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나 <후한서>에 기댈 수밖에 없다. 두 역사서는 마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韓)에는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三韓)이 있다. 마한은 한반도의 서쪽 일대에 있다.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북쪽에는 낙랑이 있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큰 나라는 일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 정도다. 삼한 중에서 마한이 제일 컸으며 훗날 마한을 병합한 백제는 마한의 작은 소국 중의 하나였다."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기·충청·전라지역에서 성립되기 시작한 연맹왕국 마한 54국의 위치는 여전히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다만 지금의 전남지역에는 '내비리국' 등 15개의 작은 왕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금동관 내관. 타출기법으로 여러 개의 꽃을 장식했다 |
ⓒ 문화재청 |
▲ 세움 장식의 끝부분에 달려있는 유리옥. 15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영롱하다 |
ⓒ 문화재청 |
신촌리 금동관은 높이 25.5cm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두 장을 붙여서 만들었다. 겉면은 인동문(忍冬文)으로 구획하고 안쪽에 '타출기법'으로 여러 개의 꽃을 장식해 놓았다. 이는 금속에 구멍을 뚫는 '투조기법'을 사용한 백제의 제작방식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장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금제관식은 모관에 세움 장식을 따로 세웠지만 마한의 금동관은 관테의 앞면과 좌우에 풀꽃모양의 세움 장식을 못으로 고정했다. 무엇보다 세움 장식의 끝부분에 유리옥을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 신촌리 금동관(좌측)은 '타출기법'을 사용했으나 공주 수촌리에서 발견된 백제 수촌리 금동관(우측)은 금속에 구멍을 뚫은 '투조기법'을 사용했다. |
ⓒ 문화재청 |
제작기법과 금동관의 양식을 봤을 때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크게 다른 토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백제왕의 하사품이 아닌 영산강 유역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최근의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라고 했다. 1997년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1500여 년 전 영산강 유역에 백제와 확연히 구분되는 고대국가 '마한(馬韓)'의 존재를 증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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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35호(2023년 3, 4월)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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