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두 번 찾아간 '슈퍼 을'…美 업체가 도전장
미국이 막대한 보조금을 통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 등 반도체 제조기업들을 자국으로 유인하는 한편,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도 영토 확장을 노리고 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시장에서 ‘슈퍼을(乙)’로 불리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하고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줄 신제품을 내놓으면서다. 이에 따라 미국이 설계·제조와 소부장 등 반도체 산업 전 영역에서 패권을 확대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슈퍼을’ ASML에 도전장 내민 AMAT
2일 외신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는 1일(현지시간) 반도체 칩 제조 기계 ‘센튜라 스컬프타(Centura Sculpta) 패터닝 시스템’을 인텔에 공급했다. AMAT 측은 “이 기계를 사용하면 EUV 노광 단계를 줄여 반도체 제조에 소요되는 비용을 절감하고,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광은 미세한 반도체 회로 패턴을 웨이퍼 위에 그리는 공정을 말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이 기기는 노광공정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 준다”며 “ASML이 지배하고 있는 노광공정 시장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ASML은 그동안 최첨단 미세공정에 필요한 EUV 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해왔다. 반도체 공정이 점점 미세화하면서 물리적으로 회로를 그리는 데 한계가 있다 보니 빛을 이용한다. EUV 장비는 7나노미터(㎚·1㎚는 10억 분의 1m) 이하 첨단 공정에서 필수 장비로 꼽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20년과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에 직접 방문하며 장비 확보에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ASML의 노광기기는 더블 패터닝(기판에 원하는 회로를 식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두 번 이상 패터닝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고밀도 패턴을 절반으로 분할해 새기는 방식으로 그만큼 공정 시간과 전력, 물 사용량이 증가한다. 하지만 AMAT 측은 새로운 패터닝 시스템이 적용된 자사 제품은 그 과정을 단축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AMAT에 따르면 이 기기를 사용해 매달 10만 개의 웨이퍼를 처리하는 라인을 운영하는 경우 2억5000만 달러(약 3300억원)를 절약할 수 있다. 웨이퍼당 50달러의 비용과 15㎾(킬로와트) 전력이 감소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웨이퍼 하나에 들어가는 물은 15L 줄어들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0.35㎏ 감소한다.
그동안 반도체 업계에서는 ASML의 노광장비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큰 과제였다. 대당 2000억원에 달하는 초고가인데, 생산량은 연간 40대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초고난도 기술이 필요해서다. 기기를 많이 보유할수록 기술력이 좋아지고 수율(정상품 비율)이 증가해 반도체 업체들은 한 대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보유한 EUV 노광장비는 TSMC의 절반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설계·제조·소부장 ‘메이드인 USA’ 노린다
외신들은 AMAT의 신기술로 ASML가 지배하는 첨단 장비 시장에 지각변동이 생길 수 있다고 관측했다. 블룸버그는 “주요 잠재 고객인 TSMC·삼성전자·인텔 중에서 인텔이 이미 AMAT의 새 제품을 채택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메이드 인 USA’를 강조하는 미국이 설계·제조부터 소부장(소재·부품·장비)까지 모두 장악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반도체과학법 가이드라인을 보면 노골적으로 미국에서 만들라는 식”이라며 “첨단 반도체 장비 기기까지 미국산이 늘어난다면 반도체 업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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