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들도 깜놀... 스페인이 또 한 번 거대한 '사고'를 쳤다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임상훈 2023. 2. 2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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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여성과 성소수자의 인권 위한 법 통과시킨 스페인 의회

[임상훈 기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 위키미디어 공용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있다.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으로 유명한데, 생각해보면 유무형 통틀어 이 대성당만큼 스페인을 잘 표현하는 문화재가 또 있을까 싶다.

딸깍발이 선비 같은 꼬장꼬장한 고딕양식을 골격으로 하지만 자유분방한 표면의 화려함은 어디에도 비할 곳이 없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하느님이 만든 선'이라는 가우디의 말처럼 신을 닮고 싶은 인간의 심지와 그 궁극적 지향이 하나의 작품에 담겨 있다. 

윤리적 기강에 가려질 수 없는 자유를 역설한 허균 선생이 이 대성당을 봤다면 성인보다 높은 하늘의 본성이 표현됐다며 무릎을 탁 쳤을 성싶다. 숭고의 극치랄까, 단순히 규모의 웅대함 뿐 아니라, 승화적 의미에서 숭고함의 결정(結晶)을 보여 준 작품이다.

유럽대륙 서남단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은 이처럼 반전이 매력인 나라다. 국민의 76%가 가톨릭교도이면서 '정열의 나라'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나라. 한마디로 성속(聖俗)의 조화가 살아 있는 곳이다. 

프랑코 총통의 40여 년 종신 독재를 막아내지 못했고 심지어 그의 유언에 따라 왕정복고까지 이뤄졌지만 그 이후의 민주화는 어느 서방 국가 못지않은 수준이 됐다. 프랑코의 (온건파) 후예들이 아직까지 주요 정당(국민당)을 이루고 있지만 서방 국가 어느 곳보다 진보 정권이 오랜 시간 집권한 나라다. 

유럽 국가 가운데 가부장적 질서가 큰 나라로 알려졌지만 동성결혼 법제화(2005년)를 네덜란드, 벨기에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실행한 나라다. 다양한 여론조사를 보면 현재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스페인 국민의 비율(75~85%)은 가톨릭교도만큼 높다. 한마디로 소수자를 존중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신념을 가진 국민들이다. 

그런 스페인이 이번에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전례 없는 내용을 담은 두 가지 법을 의회가 통과시킨 것. 이쯤 되면 소수자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유럽의 다른 선진국들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다. 

"성 정체성의 자유로운 결정 인정"
 
 지난 16일(현지시간) 이레네 몬테로 스페인 평등부 장관(가운데)이 스페인 마드리드의 의회 밖에서 성소수자 활동가들과 함께 트랜스젠더법 통과를 축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수개월의 열띤, 때로는 격렬한 논쟁 끝에 스페인 의회는 지난 16일 유럽에서도 혁신적이라 평가하는 소위 '트랜스젠더법'을 통과시켰다. 집권 사회인민당의 연정 파트너, 뽀데모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 소속의 이레네 몬테로 평등부 장관은 해당 법의 의회 통과 직후 "우리는 오늘 성 정체성의 자유로운 결정을 인정함으로써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선언했다. 

이제부터 16세 이상의 스페인 국민은 스스로 결정한 자신의 성별을 간단한 행정 신고를 거쳐 신분증명서에 반영할 수 있게 됐다. 스페인 하원의 191표 찬성(반대 60, 기권 91)이 만든 새 법조문에 따르면 성정체성에 관한 개인의 선택이 광범위하게 법적으로 공식 인정될 수 있게 된다. 새 법에 따르면 주민등록상 성별의 첫 등재뿐 아니라 수정 또한 본인의 판단이 최종 결정 요건이 된다. 

성 정체성과 관련한 인간의 판단은 2차 성징 시기가 되면 어느 정도 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16세 이하라 하더라도 14세 이상이면 법적 보호자의 동의 하에 동일한 권리가 주어지고 12세 이상의 경우에는 법원의 승인을 통해 역시 동일한 권리를 얻게 된다. 

지금까지 스페인에서 성전환은 성인에게만 허용됐고, 의료 진술서와 2년 이상의 호르몬 치료 증거를 제공해야 가능했다. 반면 이제부터 성전환은 청소년기부터 허용되며 의료진의 판단 필요 없이 본인의 선택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유사한 법을 스페인에 앞서 덴마크가 2014년 제정한 바 있다. 트렌스젠더의 천부인권을 세계 최초로 인정한 덴마크 역시 모든 국민은 간단한 행정 신고를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로써 스페인은 동성결혼 허용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성전환 자유 결정 권리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정한 국가가 됐다. 

새로 시행될 관련 법은 또한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성별 결정, 정체성, 표현을 '교정'하기 위한 어떠한 성전환 치료도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즉 타인의 성정체성과 관련한 치료를 기도하는 개인, 단체에 최대 15만 유로(약 2억 800만 원)까지 벌금이 부과된다. 

또한 간성(intersex) 또는 양성(hermaphrodite), 즉 신체적으로 두 성별의 특징을 가진 모든 개인에 대해 12세 이전에는 의료적 판단이 있지 않는 한, 성별을 결정짓기 위한 수술이 금지된다.  12세에서 16세 사이에는 심리 평가를 거친 본인의 요구에 한해서만 수술이 허용된다. 

새 트렌스젠더법이 규정하는 내용에는 출산이 가능한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성향 여성들에 대한 출산 지원 보장이 담겨있으며, 혼외 자녀의 친자 관계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수정을 보장하고 있다. 

요컨대, 스페인 의회가 새로 법제화한 트렌스젠더법은 개인의 성정체성이 신체적 성별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겪을 수 있는 여러 사회적 불편, 고통에 대한 법적 보호 조치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성정체성 문제가 병리적 접근을 통한 '개선'의 대상으로 여겨졌다면 앞으로는 '탈병리화'를 통한 보호와 보장의 대상이 된 것이다.

유럽에 전례 없는 '생리휴가 관련 법' 통과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헌법재판소에 스페인 국기가 보인다.
ⓒ 연합뉴스
성 소수자를 위한 트렌스젠더법이 인권적 대상의 '탈병리화'를 선언한 것이라면, 이번에 스페인 의회를 통과한 또 하나의 법은 정상과 일상으로 취급되던 여성들의 주기적 고통에 대해 공식적으로 '병리화'할 것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페인 의회는 '생리휴가에 관련된 법'을 다수결에 의해 통과시킴으로써, 유럽에서는 전례가 없는 새로운 한 발을 내딛게 된다. 유사한 법적 보장이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유럽에서 아직까지 생리 휴가를 보장하는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이 다소 의외로 여겨진다.

유럽 언론들은 이번 스페인 의회의 생리휴가 관련 법을 보도하면서 일부 아시아 국가들의 여성 인권 보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잠비아 등 전 세계에서 일부 국가만 생리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한국과 차이점이 있다면 스페인의 새 관련법은 한 달에 한 번 생리휴가를 유급휴가로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궁내막증'이라는 명백한 병리 현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이제부터 생리통은 스페인에서 사회보장자금으로 지원받게 된다.

'생리휴가에 관련된 법'은 '트렌스젠더법'과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논란거리도 있다. 스페인 의회 표결 과정을 봐도 '트렌스젠더법'에 비해 '생리휴가에 관련된 법'에 찬성표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눈에 띈다(찬성 185, 반대 154, 기권 3).

우선 생리와 관련된 고통은 트렌스젠더와 같은 소수자 인권 보호 차원과 달리 국민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에 대한 보편적 문제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두의 문제라는 보편성이 인권 보장을 방해한 측면이 있다. '너만 그러니' 식의 접근 태도의 문제다. 보편복지 원리가 일반화되어가는 시대에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또 하나는 남성과 비교해 벌어지는 논란이다. 보편복지와는 반대의 측면이다. 스페인 여성계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여성을 약한 존재로 격하시킨다는 논리다. 또한 남성을 향한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생리통을 병리적 현상으로 판단하면서 해결된다. 병리 현상에 대한 보상이 차별 또는 역차별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존재 상태의 이유로 고통, 소외, 차별을 당하지 않는 것, 또는 그것이 발생했을 때 보상하는 것, 이것이 문명사회의 기본 요소다.  

문명사회는 비정상적 병리화를 정상으로 복권하는 것, 그리고 비정상적 일상을 병리화를 통해 보호하는 것, 이 두 방향의 끝없는 감시와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이번에 스페인 국민들은 더 나은 문명화를 향해 또 한 발자국 인류를 견인했다.

¡Y viva España!(스페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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