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혁⑩] 진보가 만들고 보수가 환영한 독일 ‘하르츠 개혁’
고용유연성·복지 축소에 반발 낳기도
한국 실정 맞게 취사선택 요령 필요
개혁이라는 건 본래 사회 불안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불붙기 마련이다. 독일의 노동 개혁이 그랬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4년 국제노동브리프를 통해 분석한 당시 독일은 실업자가 400만 명이 넘었다. 실업률은 10%대를 오갔다. 2000년 이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인구구조는 고령화를 촉진했다. 고령화는 연금제도와 건강보험 부담을 키웠다. 이는 사회보장체계 붕괴 위험으로 번졌다. 독일은 결국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합의에 도달했다.
2002년 당시 선거를 앞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광범위한 노동시장 개혁을 위해 폭스바겐 노무 담당 이사 출신인 페터 하르츠 주도하에 ‘노동시장의 현대적 서비스 위원회’를 꾸리게 했다.
이후 재집권에 성공한 슈뢰더 총리는 위원회 제안을 포함한 ‘어젠다 2010’이라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여기에 포함된 노동시장 관련 내용을 4개 법안으로 만드는 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하르츠 개혁’이라 부른다.
장기 실업자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시작한 하르츠 개혁은 총 4단계로 나뉜다.
하르츠 Ⅰ법은 연방노동청을 개편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새로운 형태 일자리와, 일자리 교육을 위한 일자리센터 바우처 제도, 인력알선대행사와 기간제 일자리 등의 도입을 담고 있다.
실업보조금 수령 요건을 강화하고 그 금액이 일반 임금과 비교해 어느 정도 수준 이상 높아지지 않게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하르츠 Ⅱ법은 미니잡(mini job)에 대한 정의와 과세를 중점으로 다뤘다. 기존 월 325유로 이하 직업을 미니잡으로 인정하던 것을 월 400유로로 상향해 주 15시간 이상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인 자영업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정부가 직접 지원할 수 있게 했다.
하르츠 Ⅲ법은 연방노동청을 연방노동중개소로 전환하는 내용이다.
하르츠 Ⅳ법은 기존 실업부조와 사회부조를 실업급여Ⅱ로 통폐합하고, 실업급여Ⅰ 지급 기한을 18개월로 줄였다. 연방노동중개소에서 추천한 교육에 참석하지 않거나 일자리를 거부하면 실업급여를 삭감할 수 있도록 했다.
하르츠 개혁은 장기 실업자를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려는 목표가 강했다. 높은 실업률 탓에 ‘나쁜 일자리라도 실업보다는 낫다’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어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선택했다. 미니잡 활성화가 대표적이다.
독일에서 미니잡은 사회보험료가 면제된다. 독일 정부는 하르츠 개혁 이후 주 15시간 이상 일하더라도 월 400유로(2013년 이후에는 450유로) 이하 임금을 받으면 산재보험을 제외한 사회보험료와 세금을 면제했다.
파견노동자를 쓸 수 있는 기간은 제한도 없앴다. 신규 창업 기업은 4년간 기간제 계약직을 채용하는 데 있어 ‘객관적 사유’가 없어도 됐다. 해고보호법을 적용하지 않는 사업장 범위도 5인 이하에서 10인 이하로 넓혔다.
장기 실업자 노동시장 끌어내기 위해 실업급여 축소
실업급여도 대폭 손질했다. 실업급여는 하르츠 개혁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을 낳은 대목이다. 진보 정권이 만든 개혁안을 보수 진영이 더 환영한 이유 중 하나다.
개혁 이전 독일 실업자들은 나이와 가입 기간에 따라 최장 32개월간 재직 때 수입의 3분의 2까지 실업급여로 받았다.
실업급여 기간 재취업에 실패해도 일할 때 벌던 돈의 53~57%를 기간 제한 없이 ‘실업부조’로 받았다. 저소득층은 별개로 사회부조까지 받았다.
개혁 이후 실업부조는 지급 조건이 엄격해졌다. 보장 수준도 기초생활보장으로 낮아졌다. 공공 고용서비스를 통해 소개받은 일자리를 합리적 이유 없이 거부하면 급여를 삭감햇다.
일련의 개혁 과정은 장기 실업자를 노동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내용이었다. 당연히 반발도 거셌다. 15년 만에 월요시위가 부활하기도 했다.
거센 반발과 달리 개혁 이후 실업 지표는 크게 개선됐다. 2005년 11.3%였던 실업률은 2021년 3.6%까지 떨어졌다. 실업자 수는 500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2%의 절반 수준이다. 15세 이상 24세 미만 청년실업률도 7%대로 OECD 평균(12.8%)보다 낮다.
독일 경제 변화가 온전히 하르츠 개혁 덕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2002년 이후 독일 성장은 유럽 통합에 따른 통화 절하 효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노동 질이 하락한 점이 비판의 도마에 자주 오른다. 전체 4200만 명의 독일 노동자 가운데 760만 명이 미니잡으로 일한다는 통계도 있다. 하르츠 개혁 이후 절반 가까이 늘었다. 파견 노동자 또한 2001년 34만여 명에서 2017년 100만 명이 넘었다.
미니잡이 늘면서 실질임금이 낮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실질임금 감소는 정규직 고용 중심 제조업과 저숙련 비정규직 서비스업의 격차 문제로 번졌다.
하르츠 개혁은 분명한 성과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도 던졌다. 이 때문에 하르츠 개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독일 사회는 20년이 넘도록 하르츠 개혁을 계속 수정하고 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시장 내 불평등 고착화와 저질 일자리 양산 문제를 풀어내려면, 하르츠 개혁을 우리의 맥락에 맞게 ‘의역’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실업자(구직자)에 대한 보호와 서비스, 직업훈련의 실질성, 일자리 중개와 관련한 인프라 등에 있어서 우리와 독일은 출발점부터 다르다”고 강조했다.
박 연구위원은 “하르츠 개혁의 취지를 헤아리면서 우리도 고용서비스 현대화에 노력할 필요가 있겠으나, 그 이전에 일단 중개될 일자리의 질부터 챙겨야 한다고 본다”며 “하르츠 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만 한 게 아니라 일자리 알선이나 직업훈련 등 고용서비스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우리 문제가 뭔지 제대로 진단하고 발본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해가야 한다”며 “헌법이 말하는 국가가 ‘적정 임금’을 보장할 의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돌아볼 때”라고 덧붙였다.
[노동개혁⑪] 서두르다 놓칠라…속도보다는 ‘우보천리’ 지혜를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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