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산업대신은 왜 윤석열 정부 기대에 선을 그었나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대신 |
ⓒ 연합뉴스 |
자민당 출신의 7선 중의원 의원인 니시무라 대신의 발언에 관해 이날 일본어판 <로이터통신>은 '전 징용공 문제와는 다른 논의 -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관련 니시무라 경산상'이라는 도쿄발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괄호 속 내용은 원문 그대로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21일 각의 후의 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와 관련해 '한국의 수출관리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실효성을 따져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표시했다. 전 징용공 문제의 해결을 향해 일·한이 양보해 접근을 보이는 가운데, 수출규제는 '안전보장의 관점에서 수출관리를 적절히 실시하고자 시행한 것이므로 노동자의 문제(징용공 문제)와는 전혀 다른 논의다'라고 견제했다."
같은 날 나온 <지지통신> 기사 '전 징용공과는 다른 문제, 한국 수출규제 - 니시무라 경산상' 역시 대동소이하게 보도했다.
윤석열 정부는 행정안전부 산하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같은 전범기업들의 배상 책임을 떠맡되 일본 측에 성의 표시만 요구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윤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 중 하나는 경제적 이익이다. 강제징용 배상 청구를 포기하면 2019년에 시작된 일본의 경제보복이 해제되리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지난 1월 19일 정례 브리핑 때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한국 정부가 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 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 조치를 즉각 해지할 수 있다는 보도가 사실이냐'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수출규제 문제는 양국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현안인 강제징용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이 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프놈펜 한일정상회담 직후인 작년 11월 16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언론에 밝힌 내용도 비슷했다. 이 관계자는 "한일 관계에서 수출규제 문제, 지소미아 문제, 강제징용 문제, 위안부 문제 등은 다 연결된 문제이고, 그래서 윤 대통령도 포괄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고 말해왔다"라며 징용을 중심으로 여타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징용과 경제를 일괄 타결하는 그랜드 바겐 방식은 윤 대통령의 지론이다. 2021년 6월 29일 대선 출마 선언 때도 이를 언급했고, 2022년 9월 18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이런 인식을 기초로 윤 정부는 한국이 식민지배 문제를 양보하면 일본이 경제적 선물을 주리라는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다.
▲ 21일 일본어판 <로이터통신> 기사 '전 징용공 문제와는 다른 논의 -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관련 니시무라 경산상' |
ⓒ 야후 재팬 |
하지만 윤 정부가 기대한 대로 일본이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과 한국이 징용 문제를 포기해도 경제적 이익이 의외로 크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는 두 문제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공식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징용 문제가 막바지에 도달했으므로 한국의 입장을 고려해 완화된 모양새를 보일 만도 한데, 주무부처 장관인 경제산업대신은 두 문제는 별개라며 선을 그었다.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카드를 쉽게 내려놓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장면들이다.
니시무라 대신은 수출규제를 풀려면 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기한 소송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그는 "우선 한국이 개시한 WTO 프로세스를 정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수출관리에 관해서는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먼저 요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수출규제에 대한 한국의 대응조치부터 먼저 해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징용문제 때문에 윤 정부의 심기를 고려해야 할 상황인데도 니시무라 대신이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베 신조 피격 이후 추락한 내각 지지율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데다 4월 지방선거 때문에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징용 문제에 대해 강경한 일본 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한국 정부의 요구에 화답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징용 문제가 봉합된다 해서 역사문제가 다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소송도 있고, 독도로 인한 긴장감도 여전하다. 한국 정부가 징용 문제에 관한 최종 선언을 하고 기시다 내각이 수출규제 해제로 화답한 뒤 독도 영유권이나 위안부 문제가 크게 불거지게 되면 기시다 내각은 지금보다 훨씬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징용 문제 봉합 뒤에 기시다 내각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제한적인 수준에 그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적 이익이 클 것이라며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한을 억누르는 윤석열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8회 국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 대통령실 |
한일협정이 한국 경제에 불리하다는 점은 당시 주한프랑스대사관의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협정 내용이 윤곽을 보인 뒤인 1965년 4월 14일 주한프랑스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 협정에 대한 제3자의 객관적 시선을 잘 보여준다.
2015년에 <사총> 제84호에 수록된 민유기 경희대 교수의 논문 '프랑스의 1960년대 한국 대외정책 인식: 한일협정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프랑스대사는 한국 정부가 무상 공여 3억 달러 부분을 성공작으로 자평하는 부분과 관련해 "이는 표면상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일본이 여러 실질적인 이득들로 보충을 받고 있다"라고 평했다. 그는 일본 기업들이 한국의 저렴한 노동력 덕분에 훨씬 큰 이익을 얻게 되리라는 전망도 보고서에 담았다.
1965년 협정은 독도에 관한 주권적 권리도 약화시켰다. 한일기본조약 부속협정인 한일어업협정은 독도로부터 12해리가 아닌 동해안으로부터 12해리를 한국 전관수역으로 인정함으로써 독도 지배권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또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2006년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한일협정을 앞두고 체결된 그해 1월 11일의 독도밀약에서 한국은 '독도 경비력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짓지 않으며,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독도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한일어업협정은 어업수역 상당 부분도 일본에 내주었다. 이승만 정권이 설정한 평화선은 독도를 넘어 동해의 중간 지점보다 좀 더 동쪽에 설정됐었다. 이에 반해 어업협정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하고 여기서는 한국이 일본 어선을 나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승만 라인으로도 불리는 평화선을 일본이 인정했든 안 했든, 어업협정은 이승만 라인을 무력화시키고 동해 경계선을 서쪽으로 당겨와 일본 어업의 서진을 가능케 했다. 독도 영유권도 모호하게 봉합하고 어업수역도 대폭 양보한 것이 무상 3억 달러로 보충될 수 있겠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때처럼 윤석열 정부도 경제를 위해 역사를 포기한다는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니시무라 경제산업대신의 발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일본은 언제든지 '강제징용과 수출규제는 무관하다'며 윤 정부가 기대하는 반대급부의 액수를 낮출 가능성이 있다. 독도나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라도 윤 정부를 쥐고 흔들 경제적 카드를 남겨놓으려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일본 정부에 휘둘리면, 역사문제뿐 아니라 경제도 함께 놓칠 가능성이 존재한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토끼 한 마리를 주저 없이 포기하고 다른 한 마리만 정신없이 쫓다가 그 다른 한 마리마저 놓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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