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미래]⑧新성장 거점? 까딱하면 눈 뜨고 코 베인다
절대 손해 안 보는 협상 달인들…시종일관 느긋
장밋빛 미래 장담 일러 "충분한 이해가 우선"
영화 '홀로그램 포 더 킹(2016)'에서 앨런 클레이(톰 행크스)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에게 신기술을 팔고 오라는 특명을 받는다.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약속이 밥 먹듯 취소된다. 클레이는 뒤늦게 실상을 파악하고 체념한다. "이 도시에 IT 시스템을 공급하고 싶은데 국왕께서 언제쯤 오실지 알 수가 없군요." "약속을 받으신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런 건 없었지만 일이 빨리 진행될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럼 우리도 좋죠. 국왕이 여기 안 온 지 꽤 됐거든요." "얼마나 됐는데요?" "여기 온 지 18개월 됐는데 아직 나타난 적이 없어요."
최근까지 사우디에서 근무한 A씨는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왕정 국가라서 거의 모든 사업이 정부를 통해 이뤄진다. 발주처이다 보니 해외 기관·기업과의 협상에서 시종일관 느긋하다. 단번에 '노!'라고 못 박지 않는다. 긍정적 검토를 운운하며 시간을 질질 끈다. 지루한 줄다리기를 이어가다 다른 파트너를 찾으면 태도를 바꾸고 불합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국내 콘텐츠 기업들이 새겨들어야 할 조언이다. 올해 아랍 정부들과 교류가 많아질 수 있어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사우디 문화부와 K-팝, 영화, 드라마, 언어, 문화유산 등 폭넓은 분야에서 문화교류 지평을 넓히기로 합의했다.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와의 문화협력 양해각서 후속 조치를 구체화한 '제2의 중동 붐 특별 전담 조직(TF)'도 발족했다. 박보균 장관은 "중동의 문화중심지에 우리 문화·콘텐츠를 과감하고 밀도 있게 선보여 한류 확산은 물론 연관 산업 수출을 이끌도록 노력해 달라"라고 주문했다.
장밋빛 미래를 장담하기는 이르다. 많은 콘텐츠 기업이 아랍 문을 두들겼으나 충분한 실익을 챙기지 못했다. 예컨대 K-팝 행사를 진행한 B사는 거의 모든 운영 권한을 해당 정부에 넘겨야 했다. 드라마 방영권 판매에 나선 C사는 현지 콘텐츠 플랫폼이 막바지에 단가를 후려쳐 거래를 포기했다. "두 작품 계약이 성사되기 직전 여덟 작품을 공짜로 얹혀 달라고 요구했다. 순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정부가 추진하는 교류도 빛 좋은 개살구일 수 있다. 복잡한 셈법은커녕 현지 사정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랍에서 사업하는 D씨는 "문체부에서 한국을 주빈국으로 초청한 샤르자 국제도서전을 '아랍권 최대 도서전'이라고 소개해 눈을 의심했다"라고 지적했다. "UAE 최대 도서 행사는 아부다비 국제도서전이다. 샤르자는 막 미디어시티가 조성되는 토후국이다. 모든 면에서 아부다비나 두바이에 한참 못 미친다."
국내 기관·기업도 협상에서 충분히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현지에서 K-콘텐츠 수요가 급증한 까닭이다. 일부 정부는 정권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비전 2030'을 내세운 사우디가 대표적인 예다. K-콘텐츠를 앞세워 젊은 층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 미국·유럽보다 내용이 건전하고 보수적이라서 이질감이 적다고 생각한다. 사우디의 중위연령은 29.9세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K-콘텐츠 사업은 K-팝 공연과 온라인 게임이다. 전자는 방탄소년단(BTS·사우디 리야드), 슈퍼주니어(사우디 제다), SM타운(두바이), 케이콘(리야드·아부다비) 등의 콘서트가 성황을 이뤘다. A씨는 "암표가 100만 원 넘게 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라고 전했다. 사우디나 UAE 정부는 일찍이 흥행을 확신했다. 관련 협상에 참여했던 E씨는 "해당 관광청에서 현지는 물론 인근 나라의 K-팝 인지도 순위까지 주 단위로 조사해 기다리고 있었다. K-팝 공연을 자국 관광 사업을 활성화할 수단으로 여겼다"라고 말했다.
A씨는 "아랍만큼 사업하기 어려운 곳도 없다. 눈 뜨고 코 베이기 쉽다"라며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중동과 아랍의 차이조차 모르고 건너오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사우디와 UAE를 비슷한 나라로 치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본 정서에 방점 찍힌 마케팅이 한국에서 통하겠나. 상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부터 우선돼야 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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