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기념일의 천재

2023. 2. 17.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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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초콜릿 드세요.” 아침 출근길에 들르곤 하는 작은 카페에서 낱개 포장된 미니 초코바를 받았다. 아, 밸런타인데이였지. 이 카페는 가끔 이런 귀여운 이벤트를 연다. 근로자의 날을 하루 앞둔 오후에는 모든 메뉴를 50% 할인했었다. 여름의 어느 날엔 딸기를 싸게 구했다며 딸기주스를 할인하고, 카페 개업기념일에는 회원의 날이라고 무료로 커피를 쏘기도 한다. 뭐 이런 걸 다 챙기나 하면서도 단골 고객은 즐겁고 고맙다.

사실 무슨 ‘데이’라고 이름 붙여진 날들에 무뎌지고 있었다. 나이 때문일까, 그날의 의미는 뒷전이고 그저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점점 반감이 생겼다. 기념일에 유난을 떨지 않는 사람이 멋있게 느껴졌다. 물론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마케팅에 휩쓸려 가까운 사람들의 선물을 사거나 훌륭한 초콜릿을 찾아다니는 이중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은 고맙고, 가까운 사람이 내 생일을 잊기라도 하면 서운하다.

언젠가부터 생겨난 신종 ‘데이’들이 너무 많기는 하다. ‘월별 데이’를 검색해 보니 빼빼로데이를 비롯해 커플데이, 삼겹살데이, 블랙데이, 오이데이 등 상상을 초월하는 ‘데이’들이 난무한다. 출처가 빤하거나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를 근본 없는 날들에 거부감이 든다. 딱 봐도 상술이고 억지인데 여기 반응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누굴까. 우리에게 왜 이렇게 많은 ‘데이’들이 필요할까. 일상이 단조롭고 외로워서 그럴까. 주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받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결국 타인과 연결되고 싶다는 것 아닐까.

우리가 정말 주고받고 싶은 것은 초콜릿이나 사탕이나 장미가 아니라 마음이다. 어떤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시간과 비용과 정성을 들이는 것은 분명 상대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다. 그날을 기회 삼아 표현하려는 것이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 대신 ‘밸런타인데이라 샀어요’ 할 수 있으니까. 고맙다, 미안하다는 쑥스러운 말 대신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할 수 있으니까. 나의 용기가 좀 부족해도, 받는 사람의 부담이 좀 커도 그날엔 슬쩍 묻어갈 수 있으니까.

요즘 읽고 있는 책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음악가란 멜로디, 리듬, 강약 등의 도구를 통해 물리적으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에 적절한 포인트를 주어 그 시간을 나의 것, 즉 주관적 시간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멀쩡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어떤 날을 구별해서 기념일이니, 생일이니, 새해니 하면서 악센트를 주고,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나만의 독특한 날로 만드는 사람이라면, 여러분도 바로 음악가인 셈입니다’라고.

아름다운 비유다. 일상에 특별한 날들을 만드는 것은 필요하다. 그건 우리 삶을 음악처럼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다. 시작하는 연인들의 일상은 특히 그렇다. 그들은 축제 속에 산다. 처음 만난 날의 호감, 처음 손을 잡은 날의 설렘, 첫 키스를 한 날의 기쁨, 100일, 200일, 1주년, 2주년 등 비어 있던 악보에 자기들만의 무수한 음표를 그릴 수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연애란 게 내가 해도 되는 걸 굳이 상대방이 해주는 겁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할 수 있는 것도 해주고, 안 해도 되는 것도 해주는 건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내 삶의 작곡가로서 남들과 똑같은 곳에 악센트를 주기보다는 나만의 기념일들을 만들어가고 싶다. 밸런타인데이보다 중요한 건 혼밥도 잘 못하는 내가 처음으로 혼술을 했던 날이다. 창업을 하고 스스로 대표가 됐던 날, 지금은 헤어졌지만 옛 애인을 처음 만났던 날도 기억하고 싶다. 매년 연말에는 외국에 사는 동생과 만나고, 비가 오는 날들에는 종종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전을 부쳐 먹는 세리머니를 하고 싶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기념일의 천재가 되고 싶다.

정지연(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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