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미래]③실력 키운 CJ ENM·SLL '콘텐츠 왕좌' 미드까지 손 뻗친다
기존 체제 유지하면서 리메이크, 공동 제작
국내 시장 규모 열 배 "전략적 시너지 창출"
이제 K-콘텐츠는 내수용이 아니다. 해외 전파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그만큼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지식재산권(IP)도 많이 쌓였다. 더 큰 무대에 도전할 자격을 갖췄다. 세계 콘텐츠의 중심지인 미국이다. 무턱대고 도전장을 내밀 수는 없다. 현지 적응, 맞춤형 전략, 노하우 등이 필요하다. 하나같이 오랜 시간 각고정려를 요구한다. CJ ENM과 SLL은 복잡한 절차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각각 현지 유수 제작 스튜디오인 엔데버콘텐트와 윕(wiip)을 인수했다. 궁극적 목표는 안정적 수익 모델 구축과 글로벌 단위의 수요층 확보. 올해 다양한 협력과 교류로 콘텐츠 현지화를 본격화한다.
피프스시즌으로 사명을 바꾼 엔데버콘텐트의 주력 사업은 영화와 드라마 제작·유통·배급이다. 대표적인 제작 영화로는 오스카 세 부문 후보에 올랐던 '로스트 도터(2021)'와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앰뷸런스(2022)', 데스틴 크레틴 감독의 '저스트 머시(2019)', 빌 홀더먼 감독의 '북클럽(2018)', 쿠퍼 라이프 감독의 '차 차 리얼 스무스(2022)' 등이 꼽힌다. 드라마 면면은 더 화려하다. 애덤 스콧 주연의 '세브란스: 단절(2022)'과 제이슨 모모아 주연의 'See 어둠의 나날(2019~2022)', 옥타비아 스펜서 주연의 '트루스 비 톨드(2019~2023)'는 애플TV+에서 간판으로 서비스됐다. '울프 라이크 미(2022)'는 피콕, '라이프 & 베스(2022)'·'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2021~2022)'·'매카트니 3, 2, 1(2021)'은 훌루, '도쿄 바이스(2022)'는 HBO 맥스 전파를 타고 인기를 끌었다. 피프스시즌은 유통에서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샌드라 오 주연의 '킬링 이브(2018~2022)', 제니퍼 애니스톤·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더 모닝 쇼(2019~)', '노멀 피플(2020)', '더 나이트 매니저(2016)' 등을 세계적 흥행으로 이끌었다. 한응수 CJ ENM 기업홍보팀 부장은 "지난해 제작·유통한 여덟 작품이 프라임타임 에미상 최종 후보로 스물일곱 번 호명됐다"라며 "디즈니, NBC유니버설, 워너, 파라마운트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았다"라고 부연했다.
윕의 경쟁력 또한 만만치 않다. 풍부한 네트워크와 우수한 제작역량으로 지난 2~3년 동안 다수 킬러 콘텐츠를 생산했다. 헤일리 스타인펠드 주연의 '디킨슨(2019~2021)'을 비롯해 안나 켄드릭 주연의 '더미(2020)',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2021)', 전종서 주연의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2021)', 롤라 텅 주연의 '내가 예뻐진 그 여름(2022)', 대니 보일 감독의 '피스톨(2022)' 등이다. 애플TV+, HBO 맥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BBC 등을 통해 소개돼 대중성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흥행의 중심에는 ABC 네트워크, ABC 스튜디오, ABC 패밀리 등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폴 리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작가, 에이전시 등과의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4년여 만에 궤도에 진입했다. 현지 콘텐츠 시장에서 그를 윕으로 인식할 만큼 인지도가 상당하다.
SLL은 윕의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양사 간 IP 리메이크, 공동 제작, 유통 확대 등을 구체화한다. 새로운 프로젝트도 기획·개발한다. 김찬혁 SLL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우디 해럴슨 주연의 '더 화이트 하우스 플럼버스'와 '내가 예뻐진 그 여름' 두 번째 시즌, '보드킨'을 포함해 프로젝트 110건 이상이 기획·개발·제작된다"라며 "방영 시기는 추후 플랫폼을 통해 공개된다"라고 설명했다.
피프스시즌의 행보도 비슷하다. 올해 공개하는 작품은 '세브란스: 단절'·'도쿄 바이스'·'울프 라이크 미' 두 번째 시즌을 비롯해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레이디 인 더 레이크', 에릭 남의 배우 데뷔작 '트랜스플랜트' 등등. CJ ENM과 다양한 합작 사업도 벌인다. 형태는 크게 세 가지다. CJ ENM 자회사인 스튜디오드래곤의 김제현 대표는 "피프스 시즌 IP를 스튜디오드래곤이 가져와 제작하거나, CJ ENM IP를 미국판으로 리메이크한다. 원작 기반의 아이템을 양사가 공동 기획·개발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레이엄 테일러 피프스시즌 공동 대표는 "CJ ENM의 아시아 내 영향력과 미국·유럽에서의 우리 경쟁력이 결합하면 전략적 시너지가 창출되리라 믿는다"라며 "현재 IP 공유를 토대로 한 프로젝트 열 개 이상을 공동 개발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크리스 라이스 피프스시즌 공동 대표는 "협업 콘텐츠 기획·개발에 통상 12~18개월이 소요된다"라며 "고무적인 방식으로 협업이 진행되고 있어 좋은 성과가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CJ ENM은 피프스시즌에 기대어 새로운 네트워크 흡수와 매출 제고를 노린다. 전자는 북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프스시즌이 유럽과 남미에서도 유통 거점을 운영하는 까닭이다. 후자는 차원이 다른 단가에 기대를 건다. 미국의 방송 영상 시장 규모는 1768억 달러(약 223조 원·2020년 기준). 국내(약 22조 원)보다 열 배 이상 크다. 그래서 피프스시즌과의 협업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스튜디오드래곤의 경우 스카이댄스 미디어와 함께 제작한 '더 빅도어 프라이즈'가 3월 31일 애플TV+를 통해 공개된다. 유니버셜스튜디오 그룹, 잉크팩토리와 협업하는 '설계자들'은 '파친코'의 수 휴 쇼러너가 각색·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기획·개발이 한창이다. 2020년 국내에서 방영된 '메모리스트'의 리메이크 작품은 현지 지상파인 CBS 송출을 앞두고 있다. 원설란 스튜디오드래곤 전략커뮤니케이션팀 차장은 "미국 지상파 드라마 기획·제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국내 첫 사례"라며 "포맷 판매에 그치지 않아 시즌을 거듭할수록 수익이 창출된다"라고 부연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이 밖에도 '호텔 델루나', '나쁜 녀석들', '두 번째 스무살', '오 나의 귀신님', '사랑의 불시착', '방법' 등의 리메이크를 스카이댄스 미디어, 블룸하우스 TV 등과 기획·개발 중이다.
모든 과정은 조심스럽고 진중하게 진행된다. 주성호 한국콘텐츠진흥원 미국비즈니스센터장은 "현지 인프라, 노하우, 문화, 파급력 등의 시스템을 이식받는 단계"라며 "섣불리 국내 시스템을 혼합했다가는 공멸할 수 있어 서두르지 않는 모양새"라고 전했다. 이어 "각 회사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면서 협업이 필요한 순간에만 시너지를 내지 않을까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피프스시즌과 윕을 전면에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현지 시장에서 이미 상당한 성장세와 영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인수 사실을 부각하면 1989년 컬럼비아 픽처스를 사들이고 부침을 겪은 소니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주 센터장은 "소리소문없이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편이 수익 제고에 더 유리하다"라며 "철저히 현지화 전략을 고수해야 빠른 안착이 가능해진다"라고 조언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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