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대통령의 분노와 유머

2023. 2. 13.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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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세월 탓일까? 권력 탓일까? 학창 시절 재미있고 노래 잘 불렀던 낭만파는 떠오르지 않고 분노하는 통치자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학 시절 미국 가수 빌리지 피플의 노래 ‘YMCA’를 춤과 율동을 섞어 신나게 불렀고, 장장 8분30초에 달하는 돈 매클린의 노래 ‘아메리칸 파이’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불러 인기 만점이었으며, 검찰 때도 유머와 여유가 넘쳤다고 한다.

하지만 작금의 윤 대통령은 ‘웃는 얼굴’보다 ‘성난 얼굴’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국민의힘 3·8 전당대회 과정에서 분노 표출의 빈도와 강도가 유별난 것 같다. 이준석 유승민 나경원 안철수…. 야당이 아니라 여당을 향해 윤 대통령 본인과 친윤파, 대통령비서실장, 정무수석의 입을 통해 쏟아낸 분노의 메시지는 격정적이다. “반윤의 우두머리!” “배은망덕!” “국정 운영의 방해꾼이자 적!”

분노의 결과를 지난 10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찾아보면, 윤 대통령 지지율은 3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분노의 역풍이 불었다고 할까? 올해 들어 국민의힘 당권과 관련한 윤 대통령의 공개적 분노가 잇따랐다. 이후 가랑비에 옷 젖듯이 1월부터 지금까지 37%→36%→34%→32%로 계속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분노의 반작용인 셈이다. 윤 대통령이 화를 내면 지지자들은 그것을 결단력, 추진력, 뚝심이라고 긍정 평가하는 반면에 반대자들은 독단, 당무 개입, 갈등 유발이라고 부정 평가한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역대 대통령에게는 ‘분노의 법칙’이 있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이유 불문하고 득보다 실이 더 많다. 또 대통령이 ‘자기 사람’(측근, 공직자)에게 화를 내면 효과가 있어도 ‘다른 사람’(비주류, 언론, 야당)에게 화를 내면 역효과가 난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자꾸 화를 내는 이유는 당장 가시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실제로는 물밑 반감이 커진다는 대중 심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화내는 스타일을 보면 그들의 통치 스타일이 엿보인다. 권위적인 박정희 대통령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임자, 도대체 왜 그래?”라고 묻는다. 행동파인 김영삼 대통령은 말이 필요 없이 곧바로 잘라 버린다. 즉각 경질이다. 논리적인 김대중 대통령은 화나면 하나하나 짚어가며 조목조목 따진다. 듣는 사람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대중연설에 능한 노무현 대통령은 목줄이 서고 언성이 높아진다. “제 아내를 버리라는 말입니까?” 얼음공주라는 별명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은 싸늘한 레이저 눈빛을 발사한다. 내향적인 문재인 대통령은 화가 나면 말문을 닫아 버린다. 언론은 이를 ‘침묵의 정치’라고 표현한다.

윤 대통령의 경우 화가 나면 말문이 열린다.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하면 권위가 저하되고 꼬투리가 잡히며 상대의 반발심리를 자극한다. 윤 대통령은 ‘윤핵관’ ‘윤안연대’ 같은 용어에 화를 냈는데 사실 ‘탄핵’ 같은 용어에 진짜 화를 내야 한다. 취임 1년도 안 된 대통령을 두고 야당도 아닌 여당 당권주자들의 입에서 ‘탄핵’이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오는 건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일찌감치 탄핵 공세를 폈지만 당 지지도는 하락했다. 중도층은 여야를 불문하고 탄핵이나 장외 투쟁과 같은 ‘분노적 요소’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도층 표심을 잡으려면 거칠고 위압적인 ‘분노적 수단’이 아니라 부드러운 ‘유머적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미국 역대 대통령 46명 중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처럼 유머감각이 풍부한 대통령이 업적도 최상위인 반면에 리처드 닉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처럼 화를 잘 내는 대통령은 업적도 최하위라는 평가가 있다. 유머가 많을수록 성공한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후보 시절에는 표를 얻으려고 ‘억지 유머’까지 총동원하지만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나면 최소한의 유머조차 사라진다. 윤 대통령은 특유의 여유와 유머감각을 되살려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의 국민에게 웃음을 주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3·8 전당대회와 여야 관계, 국정 운영에서도 불안하고 초조한 ‘분노 전략’ 대신 여유 있고 감성적인 ‘유머 전략’에 역점을 두기 바란다. “모든 분노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만, 좋은 이유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미국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명언이 새삼 와닿는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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