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신앙]원우현(1) “언론 자유 없이 진정한 학문의 자유 없다”

유영대 2023. 2. 12.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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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원우현 교수 외 12인은"으로 시작하는 긴급 뉴스가 당시 청취율 최고를 자랑하던 동아방송을 통해 뉴스 시간마다 톱뉴스로 전파를 탔다.

"언론의 자유가 없이 진정한 학문의 자유가 없다고 믿는 우리 신문방송학과교수들은 자유언론을 실천하는 동아와 뜻을 같이 한다"는 광고 문구를 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한양대 순서(가나다 순)로 12명 교수님들의 직함과 성명을 밝히고 국내외에 천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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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법 개척자’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원우현 고려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저서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국민일보DB


“경희대 원우현 교수 외 12인은…”으로 시작하는 긴급 뉴스가 당시 청취율 최고를 자랑하던 동아방송을 통해 뉴스 시간마다 톱뉴스로 전파를 탔다.

1973년 동아일보 사회면 톱에도 ‘자유 언론 동아일보 지지’ 헤드라인이 큼직하게 실렸다.

“언론의 자유가 없이 진정한 학문의 자유가 없다고 믿는 우리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은 자유 언론을 실천하는 동아와 뜻을 같이한다”는 광고 문구를 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한양대 순서(가나다순)로 12명 교수님의 직함과 성명을 밝히고 국내외에 천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언론의 자유를 외친 동아일보 광고.


그 당시 오글 목사 가족이 출국당하고 경찰이 갑호 비상을 내리고 사회적 긴장감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철통같이 신문 광고를 막아대는 경제적 통제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하는 현장에서 분연히 맞서 언론의 자유를 학자들이 천명한 사건이었다.

필자는 정의를 실천하는 선배학자들과 함께하여 동참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1973년 9월 경희대 정경대 조교수로 부임하여 서른을 갓 넘은 풋내기 교수의 행동으로서는 너무나 의외여서, 주위를 놀라게 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 당시 언론법에 관심을 두고 탐구하던 언론학자로서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고 핵심적 가치다”라는 기초적인 명제에 언제나 익숙해 있었다.

유학 중 언론법에 관심을 둔 언론학도로서, 보스턴 대학 언론학 풍토와 강 건너 하버드 법대생들의 법치주의가 나도 몰래 나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사회지도자들이 좌우 이념과 정파적인 투쟁의 일환으로 대정부 투쟁을 하던 분위기와는 달리 나는 어찌 보면 미국 유학 중 터득한 합리적 사고와 민주시민의 정신을 젊은 학자로서 실천한 결과일 뿐이다.

1973년 경희대 교수 시절 신문방송학과 학생들과 설악산 수학여행을 함께 했다. 뒷줄 가운데가 원우현 장로.


12인 공동 선언 후에도 아내 이방숙 교수가 동아일보 콩쿠르 입상자로서 동아 콩쿠르 성악부문 테너 이인범 상금을 기증한 연세대 음대 교수라는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흔쾌히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방숙과 원우현’ 부부이름으로 제2차 광고를 했다.

대부분 광고인이 익명으로 광고하던 때였다.

흥미롭게도 서울법대 선배이신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 교수님도 “나도 따라갑니다”라는 의미로 광고를 내면서 이목을 끌면서 부분적인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그 후 어느 날 침구가 갖춰져 즐겨 밤잠도 자던 나의 경희대 교수 연구실에 개인적으로는 가깝지 않은 경희대 김성식 명예교수님이 찾아오셨다.

저명한 서양 사학자이시고 그 당시 동아일보 칼럼에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와 국민을 일깨우시던 애국지사 이셨다.

“나 김성식인데요. 생긴 걸 보니 얌전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냥 걱정돼서 한번 찾아왔지요.”라고 하시며 한참 나이에 연구에만 몰두하고 자신의 신상도 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친구처럼 한마디를 던지시고 금방 떠나시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어느 날 김성식 교수님 부고를 보고 주소를 찾아서 명륜동 빈소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문상을 했다. 때마침 상주 노릇을 하는 사위인 경복고 동창 J 회계사를 만났다.

서로 반기면서 고인이 주신 사랑의 충고를 얘기를 나눈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장 24절)

약력=서울대 법대(법학사) 미국 보스턴 대(언론학 석·박사) 졸업,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교수, 고려대학언론대학원장, 한국언론학회 회장, 한국언론법학회 회장, 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 한국 하버드대 옌칭 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상임 부원장. 한국피알협회 회장, 몽골 국제대(Mongolia International University) 선교미디어 부총장 역임, 고려대 명예교수,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주요 저서 : 『유언비어론』(편저)(청람, 1982), 『매스미디어와 문화발전』(범우사, 1984), 『여론선전론』(법문사, 1986), 『한국미디어문화비평』(나남,1987『현대미디어이론』(나남, 1992), 『여론홍보론』(공저, 2000), 『인터넷커뮤니케이션』(공저, 2006),
역서 : 자유언론의 테크놀로지 (전예원, 1985), 경영커뮤니케이션(공역 전예원 1980), 설득커뮤니케이션 (공역 1979, 전예원).
영어 저서 : Music at the Margins(Sage 1991 공저), Mass Media Climate in Korea( Korean SICo.2007), Strategies in PR:Korean cases and Media Climate in Korea(Korean SICo.2007), Public Relations Strategy: Korean Case Studies and, Solutions(CommunicationBooks 2012), Public Relations Case Studies in Korea(CommunicationBooks 2022 December) 등이 있다.
수상 : 옥조근정훈장(2007), 한국잡지협회 잡지언론상 유공상(2001), 제2회 피알대상 한국피알협회(1994), 매일경제신문 학술상(1987),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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