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소녀의 순결한 집단자결? 일본 정부가 말하지 않는 것
작년 12월 29일 오키나와로 향해서 2주 동안 오키나와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풍경을 마음으로 보고 왔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접점이 많은 곳인 일본의 내부식민지 오키나와. 그 상흔이 현재에도 계속되는 듯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글로 씁니다. <기자말>
[차노휘 기자]
▲ 히메유리 전시관 내부 |
ⓒ 차노휘 |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직원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일일 버스 패스 티켓을 샀다. 1820엔이다. 2만 원 상당의 요금을 하루에 다 사용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 곳이 일본이다. 이곳은 구간이 더해질수록 요금이 올라가니, 장거리를 갈 경우 혹은 여러 번 버스를 탈 경우 버스 패스를 사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버스 패스는 고속버스와 마을버스는 제외된다.
일을 마치고 나서려는데, 30분 전에 산 완전 따끈따끈한 내 새비닐우산을 누군가가 헌우산과 바꿔치기 하고 가버렸다. 찝찝한 마음으로 손때 묻은 우산손잡이를 들어 올리며 오늘 일정이 썩 유쾌하지 않을 거라고 예견했다. 그래도 가야할 곳이 있다. 히메유리전시관이다.
▲ 히메유리 전시관 티켓. 티켓 안 그림은 히메유리 학도단을 백합처럼 상징화한 것이다. |
ⓒ 차노휘 |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일본 정부는 미군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오키나와 여자 중등 학생들의 간호교육을 강화하였다. 간호교육뿐만 아니라 내부식민지인 오키나와인을 대상으로 1930년대부터 '열등한 오키나와 2등 국민이 아니라 문명화되고 강력한 일본 1등 국민'을 지향하는 황민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천황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오키나와인'이 되기 위한 여러 생활도덕과 규율을 내면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군이 상륙하자 곧바로 9개의 학도 간호대를 편성하여 전장에 배치하였다. 그 중 하나가 '히메유리(ひめゆり, 백합꽃의 일종) 학도단'이다. 히메유리 학도단은 1945년 3월 23일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 157명,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학교 학생 65명 총 222명으로 결성되어 오키나와 육군병원에 배속되었다.
오키나와 육군병원에서 히메유리 학도단은 주로 후송 되어온 부상병의 간호, 물 급수, 식사 당번, 죽은 사람의 장례 등을 담당하였다. 전투 상황이 악화된 5월 하순 경부터는 히메유리 학도단도 미군에 쫓겨 일본군과 함께 섬 남쪽 끝으로 밀려나 동굴에 숨어야 했다. 그때부터는 미군과의 전투에 참여해 병사들에게 탄환을 공급하는 일을 하였지만 결국 6월 18일 포위되었다.
▲ 히메유리 전시관 중앙 정원. 정원을 따라 전시관이 연결되어 있다. |
ⓒ 차노휘 |
▲ 평화를 상징하는 사다코 종이학. 평화를 상징하는 곳은 어디든지 종이학이 있다. |
ⓒ 차노휘 |
이 죽음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진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고,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할 권리를 빼앗아 갔으며, 생명권마저 거부하도록 만들었고, 마침내 죽음밖에 없는 전장으로 짐승처럼 내몰았던 교육제도가 범한 죄를 고발한다(히메유리 평화 기념 자료관의 건립 기념문 중에서)"라고 하며, 자결이 아니라 집단학살이라고 하였다.
집단학살을 자행하게 했던 전장터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시간은 히메유리 전시관을 백합처럼 하얗게 세탁해놓았다. 지형특성상 천연 동굴 40개를 연결하여 임시 야전 병원을 만들어 부상병들을 치료하게 했던 동굴은 전시관과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애도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 구 해군사령관 전시관 |
ⓒ 차노휘 |
▲ 곡괭이로 20미터를 파내려갔다던 구 해군사령관 |
ⓒ 차노휘 |
기억조차 조작된 죽음
여전히 일본 정부는 히메유리 학도단의 집단죽음을 적군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가 꽃처럼 아름답게 목숨을 바친, 그녀들의 애국심을 찬미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히메유리 학도단은 하얀 옷을 입은 백의의 천사와 같은, 병사들을 혼신을 다해 치료하거나 황국의 병사로 영광스러운 죽음을 선택한 순결한 애국소녀로 그려내고 있다.
그로 인해 오키나와 사람들이 기억하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강요당한 '히메유리 학도단'의 기억은 몰살되었다. 대신 잘 포장된 '전쟁에 피어난 한 송이 히메유리 꽃, 히메유리 학도단'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로 오키나와 전투를 상징화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되었던 여학생 간호 부대의 경험은 결코 백합처럼 순결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60년이 넘게 불을 끄고 잘 수 없다고 하거나 부상당한 사람의 입에서 귀로 이어지는 곳으로 구더기가 기어가는 사각사각 소리가 지금까지 들린다며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증언하고 있다.
왜곡된 기억, 황국 신민으로서의 타자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그들은 기억조차 몰살당한 채 자신이 경험한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이 가슴 깊이 묻어 두고 있는 것이 한(恨)으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위령탑 |
ⓒ 차노휘 |
▲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위령탑 |
ⓒ 차노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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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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